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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괴롭혀 자살기도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살인·유괴·강도·절도 등 각종 형사사건의 피해당사자는 사건의 직접피해 외에도 경찰의 무리한 수사와 사회의 억측, 이를 이용하려는 편승범죄자들의 장난 등으로 2중·3중의 고통을 당하고있다. 어쩌다 강력사건의 피해자가 된 시민들 가운데는 사생활이 사정없이 노출되고 용의자보다 더 심한 취급을 받는 등 명예와 심신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기가 일쑤다. 이 때문에 형사사건의 피해자 가운데는 사건신고를 꺼리는 풍조까지 번지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진 것이지만 최근 유괴범에게 외아들을 잃은 윤상군의 어머니 김해경씨(42·서울 공덕2동 188의73)가 자신이 당했던 시달림을 책으로 출판,『더이상 돌멩이질을 말아달라』고 호소함으로써 또 한번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김씨는 자신의 체험담을 엮은 수기『비정이어라』는 제목의 책자에서 수사관들이『법인은 엄마의 치마폭에 있다』며 자신을 최면술과 다면성인성검사(다면성인성검사)까지 올려 괴롭혔고 엉터리 점장이와 사이비도사로부터 1백50여 차례나 시달린 데 이어 뜬소문까지 퍼져 두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고 기술했다.
김씨의 수기는 유괴살해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피해자가 수사과정에서 오히려 철저하고 냉혹하게「당하기만 했다」는 점에서 경찰의 사건수사방법에 새로운 문제점을 던져줬으며, 사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수록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약한 마음을 악용하는「괴롭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피해자가 씻지 못할 아픔을 입었다는 점에서 큰 경종을 울려 주고있다.

<경찰에서 당한 사례>
김씨는 수기에서 사건발생 10일쯤 뒤부터 자신이 의심을 받기 시작, 수사대상에 올랐다고 밝혔다.
수사방침이 치정에 얽힌 원한관계, 그것도 김씨의 남자관계로 급선회했다.
이 때부터 김씨는 없는「과거」를 계속 추궁 당해야 했으며 어떤 형사는 김씨를 앞에 두고 『범인은 어머니의 치마폭에 있다』고 까지 단정했다.
경찰의 이 같은 추리와 단정은『동네사람과 불륜의 관계가 있다』는 헛소문으로 번졌다. 김씨는 이를 견디다 못해 지난해 5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과 남편에게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유서를 써놓고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 자살을 기도했으나 가족에게 들켜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술회했다.
김씨는 그 뒤에도 남자관계를 밝히려는 경찰의 끈덕진 수사로 서울 가든호텔에 불려가 김모 반장의 유도심문을 받았다. 김씨의 응답이 신통치 않자 수사관은 김씨를 최면술에 얹었다.『윤상이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는데…』『몇년전에 걸려왔다는 남자전화를 기억하십니까…』『정욕의 불은 하나님도 끄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등 가정부인에겐 입에 담지도 못할 추악한 부분에까지 질문이 던져졌고 보장되어야 할「사생활의 비밀」도 꼬치꼬치 캐묻고 들춰내기도 했다.
심지어 김씨를 전문가에게 끌고 가 다면성인성검사라는 심리검사까지 실시했는데 이 전문가도 김씨를 의심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아『절망의 밑바닥을 헤맸다』고 토로했다.

<점장이·무당들의 횡포>
김씨 집에는 사건이후 평균 2∼3일에 한번씩 모두 1백50여 차례나 전국의 무당·점장이·도사 등이 찾아 들었다.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김씨는「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처음 한두 번은 점장이를 찾았으나 보도로 널리 알려지자 자칭도사에서부터 푸닥거리무당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이 줄지어 찾아들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윤상이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고싶은 김씨 부부를 사정없이 등쳤다.
만나는 도사마다 부적이나·말똥을 묻으라고 해서 시멘트로 된 마당을 모두 파 뒤집었다. 어떤 도사는 새벽에 삼각산에 올라가 1천 번 절을 하라고 해서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했고 그때마다 돈을 줬다고 김씨는 밝혔다.
지난해 4월에는 서울 원효로의 한 사이비교회에 찾아갔다가『고통을 참아야 아들을 찾는다』며 전신에 70여 군데를 침으로 찔렀고 몸을 밟고 두들기는 고문까지 당했다고 했다.
또 어떤 6순 할머니는 염주를 들고 마당에 들어서며『나는 돈을 바라고 온 사람이 아니야. 윤상이 있는 곳을 알고있어. 부모가 누군지 나와봐』하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는 것.

<사회의 뜬소문>
수기에서 김씨는 남편이 과로로 쓰러져 지난달 5일부터 16일까지 서울 고려병원 607호실에 입원해 간호로 집을 비웠을 때부터 새로운 헛소문이 나돌았다고 했다.
『범인 주가 윤상이 엄마와의 관계를 다 불어버려 윤상이 엄마가 쇠고랑을 찼다는 내용』 이었다.
그러나 김씨는『자신이 춤바람은커녕 박자 맞춰 발을 옮길 줄도 모른다』며『헛소문의 가혹한 돌멩이질을 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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