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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CIA·국무성 극비문서에 나타난 미국의「중동공작」<10>왕정의 보루…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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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팔레비」통치시대의 이란군대는 왕정을 지탱하는 주요한 세력이었다. 1953년「모사데크」수상과의 대결에서「팔레비」국왕의 왕권회복을 도운 세력이 바로 군부였다. 4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군사고문단이 이란군의 재건과 현대화에 큰 역할을 맡음으로써 미국과의 관계가 밀접해진다. 미국이 해외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한 것은 이란이 처음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작성한 이란군부에 관한 분석보고서는『이란군은 왕권에서 분리된 독립체가 아니라 왕권을 지키는 보루』로서「팔레비」가 육성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본사가 입수한 미 극비문서책자 제7책(47∼127페이지)에 수록돼있다.

<장교는 특권 누려>
이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이란군의 특징은「팔레비」가 군의 최고통수권자일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군의 최고사령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3군 총사령관과 육·해·공군 사령관이 있긴 하지만 국왕이 모든 주요군무를 직접 결정했다. 군의 예산·조직, 각 군의 군사정책을 국왕이 총괄했다. 인사의 경우 소령이상의 진급에 국왕이 직접 재가했고 군 이동도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국왕은 각 군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주요직책의 장성을 직접 불러 협의하고 명령했다.
3군 총사령관은 3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의 합동참모회의 의장이 행사하는 그러한 권한을 갖지 못했다.
「팔레비」는 이와 동시에 장교들에 대한 여러 가지 특전을 베풀었다. 주택구입자금제공·소득세면제·자녀교육비 부담 등이 그러한 예다.
군장성은 3백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왕정체제의 안정을 받치는 기축이었다. 수상, 비밀경찰 사바크의 장, 궁내성 장관 등의 요직에는 군장성 출신들이 기용됐다. 그러나 장성들이 그들의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팔레비」는 용납하지 않았다.
1953년「몬사데크」수상을 제거하고 의회를 해산하여 왕권을 되찾는데 공헌한「자헤디」장군과「알리·라즈마라」장군은 후에 각각 수상에 취임한다. 그러나「라즈마라」장군은 국왕과의 불화로 암살되고「자헤디」장군도 대사로 밀려났다.
1961년에도 3명의 장성이 제거됐다. 사바크(비밀경찰)책임자「화이무르·바크티아르」, 국경수비대사령관「알라비·목카담」, 육군정보사령관「하즈·알리키아」등이 그들 세 사람이다.
「목카담」과「알리키아」등 두 장성은 예편 후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사바크 사령관은 정치적 야망을 품고 유럽으로 망명하여 반「팔레비」운동을 벌이다 70년 암살됐다. CIA의 비밀보고서는 사바크의 소행으로 보고있다.
3군 총사령관의 해임사유도 갖가지다.「바흐람·아리아나」장군(66∼69년)은 이라크에 대한 강력한 대응조치를 취하자고 주장하여 해임됐다. 국왕의 매부인「페리둔·참」장군(69∼71년)은『지나친 권한행사』로「팔레비」의 눈에 나 3군 총사령관 직에서 쫓겨났다. 몇몇 육군사령관도 이와 비슷한 사유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업무상 과오를 저지른 장성은 투옥되기도 했다. 한 방첩부대사령관은 소련간첩망을 색출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또 한 국경수비대사령관은 부정혐의로 각각 구속됐다. 53년「모사데크」제거에 공을 세운「파로히니아」장군도 부정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충성도 따라 인사>
「바크티아르」후임으로 사바크 책임자로 취임한「파크라반」장군은 반체제인사에 대해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그는 63년의 소요사태 때 강경책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그 후 공보상과 주불대사를 역임하게 된 것은 왕의 특별배려 때문이었다.
「파크라반」의 뒤를 이은「낫시리」장군(「모사데크」축출의 유공자)은 전임자와는 달리 반대파에 대해 가혹한 처단을 했다.「팔레비」의 장성에 대한 문책이 반드시 가혹하지만은 않았다. 작년에 왕실 근위 사령부의 한 병사가 국왕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근위 사령관은 사표를 제출했으나 국왕은 그의 사표를 반려했다.
「팔레비」의 장성인사는 특별한 기준이 없었다. 굳이 기준을 든다면 왕에 대한 충성심인 것 같다.
공군사령관「하타미」장군(국왕의 매부)은 1958년부터 75년까지 17년 간이나 사령관직을 맡았으며 그나마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를 더 오래 차지했을 것이다.
군수사령관「투파니안」장군, 사바크 책임자「낫시리」도 장수했다.「팔레비」는 군 요직뿐 아니라 수상 직도「호베이다」에게 12년 간이나 맡겼다.「팔레비」는 그에 대한 충성심만 믿으면 어느 자리이든 오래 머물게 했다.
「팔레비」왕권의 핵인 15인 그룹의 한사람인 사바크 책임자「낫시리」장군의 처는「팔레비」의 애인이었고 이 때문에 그가 더 한층 왕의 총애를 받았던 것 같다.「팔레비」의 장성인사는 가부장적인 특징을 띠고 있었다. 국왕은 적절히 논공행상도 하고 또 징벌도 내린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성들은 과오를 범하지 않고 국왕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파문된 고급장교>
이와 같이 이란군부를 분석한 미CIA 비밀보고서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이란군 평가(1976년 현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장성과 장교의 자질은 높다. 고급장교와 장군들은 미국·프랑스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우수한 인재들이며 불어나 영어를 구사하고 대부분 이 두 나라 언어를 동시에 말할 수 있다. 장교들은 주로 상류층과 중산층출신이나 하류층출신도 차차 증가하고 있다. 상류층 이상이 장교의 주류를 이루는 현상은 앞으로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국왕이 구상하는 군의 이란화(모든 장교의 이란 인에 의한, 이란에서의 교육)는 수년이 더걸릴 것이다. 현 정치상황이 지속되는 한 이란군 해외훈련은 계속하여 주로 미국에서 실시될 것이다. 오늘까지 고위직에 이른 장교는 현 왕정체제에 적응해 있다. 78년 말 반「팔레비」시위가 이란전역을 휩쓸었을 무렵「월리엄·설리번」이란주재 미국대사는 이란군부동향에 관한 비밀보고서를 워싱턴으로 보냈다. 이 보고서는 미국대사관이 테헤란의 반체제지도자들과 접촉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까지의 군부분석과는 다른 견해를 보이고있다.
『반체제지도자들은 이란군의 독립성과 전력을 현재대로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많은 고급장교들이 이미 파문 당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반체제지도자들과 몇몇 고급장교들을 만난 결과 이란의 해방운동의 목적에 동조하거나 이들 지도자들과 접촉을 갖고 있는 고급장교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팔레비」가 망명할 경우 사임, 출국할 것으로 보이는 1백여 명의 고급장교 명단을 반체제지도자들이 우리들에게 주었다.

<쿠데타 막은 미국>
이들 장교들이 조용히 군을 떠난다면 재산과 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보복이나 체포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반체제지도자들은 말했다. 그들은 누가 이들 고급장교들의 요직을 승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부문제에 대해 이란해방운동지도자들과「호메이니」의 견해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파리의「호메이니」와 이 문제를 직접 협의할 것을 권고한다. 국무성은 이러한「호메이니」와의 접촉 권고를 묵살했으나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은 이란군 장성과 접촉하며 쿠데타의 예방을 위해 노력했음이 많은 비밀보고서에 나타나있다.「엔테잠」전 이란수상과 미대사관정치담당관「스템펠」과의 대화(79년1월17일「설리번」대사 보고전문)가 그러한 문서의 하나다.「엔테잠」은 군부 쿠데타를 막아 준데 감사한다고「스템펠」에게 말했던 것이다.
미국이 쿠테타를 막는데 적극적이었던 것은「팔레비」없는 이란에 중산층엘리트에 의해 정권교체가 이뤄질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인 것 같다. 이란은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현재 회교성직자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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