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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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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육본의 혁명군 지휘부에도 16일은 긴장의 하루였다. 서울장악에 성공하면 전군혁명으로 가리라던 예상이 빗나가 대책은 뒤죽박죽이었다.
상오10시 서울시경에서 열린 출동부대 지휘관회의는 김윤근해병여단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수도방위 사령부를 구성하고 배치룰 전면 재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배수진에 불과했다.
장도영총장은 여전히 모호했고 3군총장의 지지성명 역시 브레이크에 걸리고있었다. 육본진주부대는 장총장에대한압력을 가중시켰지만 『윤대통령을 만나 본뒤에…』 라는등의 구실을 내세워 회피했다. 결국 포병대대장들의 과격한 자폭론에 부딪쳐서야 혁명위원회 의장직을 수락했다. 시간은 하오4시였다. 의장직 수락에 대해 장총장은 미국에서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참모총장 이름으로 모든것을 하기로 계획해 이미 내 이름으로 혁명공약을 인쇄해서 뿌렸죠.
총장은 왜꾸물대나
나는 각 전방부대장들에게 전화를걸어 의견을 물어봤어요. 찬반이 반반이었죠. 당시 나의 판단으로는 진압을하자면 충들이 필연적이었어요. 수락과정에서 위험은 없었습니다. 복도에서 권총을 빼든 젊은장교 두명이<참모총장이 왜 꾸물대나>하는 식의 얘기를 하는것같은 기억은 납니다. 그들은 위험한것으로 생각했을지 몰라도나는 위협으로 느끼지는 앉았죠. 나는혁명수락을 잘한 일로 생각합니다』 라는 요지다. 장총장은 의징직 수락의 후일담을 옥중에서 털어놓은 일이있다.
박병배씨 (전국방차관·4∼5· 7∼9대의원)의 전언.
『5·16 얼마뒤 장총장이수감돼있을때 나도 체포되어 그방에 함께 갇히게 됐어요. 내가 감방에 들어가자 그는 내손을 잡으며<형님말 안듣다가이꼴이 되었는데 전말이나 얘기하겠읍니다>그러더니 이렇게 당시의 심정을 털어놨어요. <총장에 취임하자마자 밤낮 밀려오는 청탁과 압력때문에군내부를 단속할 정신이 없었어요.
특히 이철승 국방위원장등 국방위원들은 걸핏하면 불러내 「네 고향사람만 쓴다지…」로 시작해 온갖것을추궁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이필선의원을 시켜 청탁 보따리를 보내고…. 거짓말 같으면 그때의 국회속기록을보면 압니다. 거기에다 설마했던 박정희소장이 일을 터뜨렸고 나를 모시고 나라를 고친다음 군에 복귀하겠다는데 어쩝니까. 계속 거부하고 진압한다해도 수모끝에「너는 책임지고물러가라」 할것은 뻔해 혁명군 제의 를 받아들였읍니다>이건 그가 절망적이던 때의 얘기니 솔직한 심경이었겠지요.』
아뭏든 장총장의 수락은 조그마한출구였다. 다음단계 지휘부는 청와대로 눈을 돌렸다. 5·16을 지지하는윤대통령성명을 얻는 일이었다. 이 역시 손쉽게 성공해 그날밤 11시 윤대통령의 지지성명이 나왔다. 그경위에대한 유원식대령의 증언.
『박소장이 대통령 지지성명이 왜 늦느냐고해 KBS녹음반을 데리고갔읍니다. 내가<담화문 발표를 안해주셔서모두 기다리고 있읍니다>라고 했더니 비서를 불러 원고를 써오라고 했어요. 원고작성을 기다리는 사이 저녁식사를하기로 했습니다.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장총장이 들어왔어요. 그는 담화문얘기인 것을 알자 지나가다 들렀을뿐 특별한 일도없고 저녁은 이미 들었다면서 그대로 나가버렸죠. 대통령은 작성된 원고를 읽고는<이만하면됐느냐>면서 내게 건네주었지만 나는보지도 않고 그대로 잘되었다고 해방에 성명이 나간 것입니다.』
이에대해 원고작성을 맡았던 김준하대변인의 기억은 약간 차이가 있다.
『「매그루더」 「그린」이 돌아간뒤 대통령은 최두선씨등 3개신문사장, 백악준삼의원의장을 불러 의견을 물었어요. 모두 희생을 줄이는 길을 건의했어요. 마침 피신중이던 민주당 각료J씨도 전화로 신변의 안전을 부탁했어요. 이래서 장총장을 불러 각료의안전을 보장받고 장총리가나와서사태수습(정권이양)을 하라는 담화를 낸것입니다.』
주동자성격등 분석
대통령담화는 혁명지휘부가 얻어낸 그날의 두가지 성과였다. 그러나 위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유엔군사령부와 야전군의 압력이었다.
주한유엔군사령부가 서울사태를 미국정부에 타전한 것은 새벽3시. 국무성엔 서울사태 데스크가 설치되고 백악관은 정세분석을 검토했다. 그러나 자료는 불충분했다. 주동멤버의 성격과 목적, 앞날의 전망, 모두가 불투명했다.
「매그루더」사령관의 간단은 야전군의 움직임을 배경으로한 사태역전이었다. 「매카나기」국무성차관보는 원상회복을 바라는 미국의 입장을 현지의 대사와 군사령관이 권한의 범위내에서 설명할것을 승인했다. 사실 파키스탄이나 터키에서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을때 미국 의교관들이 내정문제에 개입하는 것으로 해석되는성명발표를 피했던 예와 비교할때 아주 다른 조치였다.
뜻밖에도윤보선대통령의반대에부딪친「매그루더」사령관은장면총리의행방에 기대를 걸었지만 누구도 알지못했다. 그럴때 총리비서관의 전화를 받았다. 총리의 행방에대해 모른다고하면서드 모호한데가 있어 미8군의자동차를 보내 들어오게했다. 총리공보담당은 송원영비서였다. 그러나 그들역시 총리의 행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 「매그루더」사령관은 『총리행방을 모른다면 나를 만날 필요가 없쟎은가』고 돌려보냈다.
막료진은 총리의 행방수색에 나섰다. 한창우경향신문사장이 중심이었다.
선우종원씨, 조연하의원, 노영균총경등 11인의 막료진이 그날 경향신문사장실에 모여있었다. 연고있는 집의 어디에도 없었다. 우기남주교가 나서서 성당을 하나하나 챙겼다. 라틴어로 총리가 왔는지를 물었다. 그 대상엔 총리가 피신해있던 칼멜수녀원도 물론 포함됐다. 그러나 한결같이『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총리 끝내항방불명
여영균총경의 증언.
『우리는 모든곳을 수소문했습니다. 이한림장군의 부관이 가져온 출동명령서를 보면서도 사인을 못받아주는우리 심경을 생각해 보세요. 나도 정신없이 헤메다가 조인호경감을 만났는데 그도 모른다지 않습니까. 그시간 장총리는 칼멜수녀원에서 유엔방송을 통해 사정을 체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조경감이 혼자 집을지키는 딸걱정을 했어요. 그러니까 총리가<분위기도 볼겸 나가서 데려오라>고 한거예요. 그때 나를 만난건데 내게까지 입을 다물었어요. 조경감이 신통한 소식도 못얻은채 돌아오니까 17일 아침에 프랑스 수녀원장에게 프랑스대사관에 전화해보라고 했어요. 수녀원장이 잘아는 대사관관리와 통화를 했는데 프랑스대사관이 장총리의 연락에 어떤 액션을 취했는지는 끝내 알아보지 못했어요.』
유엔군사령부와 야전군은 16일까지는 총리의 소식에 기대를 걸고있었다. 그러나 16일밤이 저물자 그 기대는 버러야 했다. 이젠 자체로서의 결단뿐이었다.
이윽고 17일 야전군엔 출동명령이내리고 유엔군사령부는 해병대와 포병단에 대한 원대복귀를 강력히 요구한다
혁명지휘부도 이에맞서 총력을 기울여 대응한다. 16일 밤과 17일 새벽은 철야의 대결이었고,17일은 긴장이 절정에 이르는 날이었다.
폭퐁직전의 17일의 대결을 미루고 일단 그 긴장을 모른채 돌풍의 한복판을 날아다닌 청와대밀사의 애기부터 옮겨보자.
청와대의 야전군 출동저지서한은 16일 밤 결졍되었다.
사태수습을 촉구하는 담화가 발표된직후 혁명군수뇌부의 요청을 윤대통령이 수락한것이다
청와대는 비서관 4명을 2개조로편성, 6명의 야전군수뇌부에 밀파했다. 그날 밀사로 급파됐던 김준하대변인의 희고.
『5월16일밤 우리 비서실은 밤새워 원고를 썼습니다. 그 단계까지 대통령은혁명을 지지한다고는 말하지 않은때였읍니다. 이런때인만큼 유혈사태를 피하기의해 야전군 출동을 만류하는 뜻이긴해도 원고를 쓰려니 여간 힘들지 않았읍니다. 뒷날 문제가 된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희생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구절은 우리도 무던히 애먹었지만 윤대통령이 고심해서 선택한 글이었읍니다.
각하의뜻에 따르자
새벽녘에야 원고가 통과되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 피로로 지쳐있는데 두대의 지프가 우리를 데리러왔어요. 나는 김남비서관과 함께 지프를 탔어요. 2명의 혁명군 중령이 안내자 였습니다. 막상 떠나기는하지만 두려웠어요. 야전군은 출동태세라고 하고이를 만류하러 가는 셈이니 죽음의길이 되는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들었어요. 그런 생각이 나자 집에 전화라도 걸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막상걸어놓고 보니 할말도 없더군요.
우리는 대기해 있는 L-19경비행기를 탔읍니다. 맨 먼저 간곳이 야전군사령부였어요.
비행장에 내리자 KMAG (미고문관실) 로 안내됐어요. 사령관 이한림중장이 헌병참모만을 대동하고 미리와 있더군요.
그는 우리의 용건을 이미 알고있는듯했어요. 그는 친서도 받기전에 혁명군지휘자들의 정체를 아느냐는 뜻의 과격한 힐문을 던졌어요. 서슴없이 진압해야한다고 했읍니다.
진압군이 출동한다해도 유혈사태는결코 없을것이라는 요지의 설명도 했어요. 우리는 말을 들을수 밖에 없었어요.우리는 대답할 말도 또 그럴자격도 없었지요. <대롱령친서를 보시지요>라고 하며 서신을 건네주었어요. 그제서야 서한을 받아 읽더군요. <알았소. 각하의 지시를 기다리겠다더라고 전해주십시오> 우리는 식은땀에 젖은채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헬기를 바꿔타고 두번째 장소로갔어요. ○군단장 민기식중장의 방으로 안내됐읍니다. <장면정부에도 문제가 있지만…>라고 민장군이 말을 시각했어요. 그의태도는 얼마간 불확실한둣했어요. 바로그때 야전복에다 철모로무장한 준장 한사람이 들어왔어요. 그는 부동자세로 우리뒤에 서있었어요. 그러자 민장군이 우리에게 소개하더군요.
사단장 박춘직춘장이었습니다. 민장군은<여기 박장군은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되풀이해 설명하더군요. 그러면서 동석해도 좋으냐고 우리에게 양해를 구해요. 우리는 거절할수도 또 굳이 거절할 이유드 없었어요. 그는 우리옆자리에 앉더니 대뜸<저는 누가 뭐라해도 장면정부는 안된다고 생각 합니다. 군의 거사를지지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우리는 아무 걱정없이 친서를 건넸다. 민장군은 읽어 보디니<각하의 뜻에 따르겠다고 전해 주십시오>라고했어요.
1주안에 궤멸된다.
우리는 다소 긴장을 풀고 마지막 지점으로 갔어요. ×군단장 최석중장을만나는 일입니다. 최장군은 대기하고있었어요. 그는 우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반란은 진압해야한다>고 단호하게선언했습니다. 그는 헌병출신인 김남비서관에게 서울진입작전도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역설했어요. 그는 친서를몹시 안타까와했어요. 그는 자기의 뜻을 전해달라고 했고 우리는 돌아와대통령께 모든것을 그대로 보고했읍니다.」
그날의 일을 말하는 최석씨(64·현 군사과학연구소장)의 증언.
『하오2시쯤 윤대통령의 비서 김남씨등 2명이 경비행기를 타고 군단사령부로 나를 찾아왔어요. 대롱령의 친서 내용은<중대한 사태를 수습하는데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있어서는 안된다. 38선방위에 만전을 기해달라>는 것이었읍니다.
양면괘지 4장에 만년필로 쓴것이었는데 맨 처음에 대통령의 친필서명과 직인이 찍혀있었어요.
금씨는 옛날 군에 근무할때 나와같이 헌병으로 잠깐 있어서 아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내가 책상위에 서울의 지도를 그리면서 진압해야한다고 강조했지요.<의정부·불광동·한강·소양리등5곳에 야전군부대를출동시켜 서울을 봉쇄하면 1주일 또는 10일만에 서울시내의 혁명군은 자연히 궤멸된다. 유혈충돌을 일으킬것도 없다>고 설명했지요.
김씨는 <대통령에게 그렇게 말씀드리겠다> 고 하더군요. 나는 그때 <쿠데타는 일단 제압하고 그뒤 쿠테타군들이 뜻하는바를 논해야한다고 했지요. 김씨가 대통령에게 내뜻을 전달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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