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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6) 제76화 화맥인맥(55) (월전 장우성) 전시의 미술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52년에는 미국에 가 있던 장 발 학장이 돌아와 미술대학이 제법 활기 있게 움직였다. 비록 판잣집이긴 해도 송도뒷산에 가 교사를 지어 충실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뿔뿔히 헤어졌던 학생들도 여기저기서 몰려들어 학생수도 피난초기보다는 사뭇 불어났다.
송도로 학교를 옮겨 일하고 있는데 하루는 충남연기에 내려가 있던 남정(박노수)에게서 편지가 왔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야겠는데 증명이 없어 오도가도 못하니 학생증을 만들어 보내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고 장 발 학장에게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학생이 부산에 오지 않았는데 학생증은 만들어 보낼 수 없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나는 남정이 좋은 학생이니 구제하자고 거듭 제안, 장 발 학장으로부터 일단 부산에 내려오면 복학은 허용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
그래 남정에게 어떻게든지 부산까지만 내려오면 복학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답장을 보내고 한 달쯤 지났을까….어느 날 갑자기 남정이 학교에 나타났다.
그는 어찌어찌 해서 부산까지는 왔지만 수중에는 무일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 같이 지냈다. 남정은 복학절차를 밟아 학교에도 나가고 대한도자기회사의 도자기그림 일거리를 맡아 생활비에 보탰다.
전시이긴 했지만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져 미술 인들은 피난지 대구·부산 등지에서 몇 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51년에는 공보처주최로 부산국제구락부에서「전시미술전」을 열고, 52년3월에는 공보처와 대한미협 공동주최로「3·1절 기념 전」을 가졌다.
대구에서도 51년3월에 대구 공보원에서「소품 전」을, 6월25일에는 6·25를 상기하는 대규모 기록화전도 열었다.
미협전은 기록화전과는 달리 순수한 회원작품만으로 3·1절, 광복절 등을 경축하는 행사를 가졌다.
대구공보원에서 연 소품 전에는 일선스케치와 장성들의 초상화가 꽤 많이 나왔었다. 종군 화가단의 단장이었던 서양화가 박득순씨는 김종오 장군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부산국제구락부에서 열었던 마지막 기록화전에 출품했던 서양화가 이수억씨의 대작『피의 능선』은 미술대장 강경모 대위와 이선근 정훈국장의 주선으로 대한중석에 고가로 팔아주었다.
내가 대한미협 전에 냈던 마른나무에 달이 걸려있는 20호 짜리『달』은 미군의「매미」소위에게 팔았다.
부산역전의 동그란 퀀시트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림 걸기가 불편, 그림을 덜렁덜렁 매달아 놓다시피 했다.
이전시장을 이웃집 다니듯 드나들던「매미」소위가 부인이 화가인데 그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탐냈다.
그는 돈은 적지만 꼭 사고 싶다고 간청해서 2백20달러에 내주었다.
미협전에는 산정(서세옥)이 출품한『남빈사리』가 문제작이라고 매스컴이 크게 보도했다.
대구 동본원사에서 열린 대규모의 6·25기념 전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개막 데이프를 끊었다.
이때는 전쟁기록화뿐 아니라 정훈국의 종군사진과 전리품 전시회도 겸해서 성대하게 열었다.
화가들의 종군활동 중 조각가 김명희씨가 순직한 일은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52년4월 김명희씨는 5사단을 따라 간성까지 종군했다.
마침 석고재료를 사기 위해 속초로 나오다가 지프가 전복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종군문화인으로는 첫 번째 희생자였기 때문에 국방부에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내가 산에 있을 때는 체신부에서 스위스 국제체신기념관에 걸 작품을 의뢰해왔다. 흰 저고리에 녹색치마를 받쳐입은 젊은 여성을 그리고, 옆에 큼직한 고려청자 항아리를 그려 넣었다.
1백호 남짓한 그림인데 화폐개혁 전이어서 돈을 보따리로 싸 가지고 왔다.
몇 십만 원을 받았는지, 몇 백만 원을 받았는지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그때로는 꽤 많은 돈이어서 피난 중에 요긴하게 썼다. 대구·부산피난시절 3년 동안은 화단이 많은 변화를 겪었다.
외국군인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새로운 미술사조도 밀려들었다.
특히 장발 학장이 미국·유럽을 돌고 들어와 화단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급진적인 외래문물의 상륙과 화단내부의 필요에 의해 현대화의 길이 열리고 추상미술이 싹트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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