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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모르고 맞닥뜨려야 맛있는 영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7호 30면

‘메이즈 러너’는 제목만으로는 속 사정을 알기가 힘든 영화다. 물론 미로를 달리는 사람이라는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슨 미로를 얘기하는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면 좋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 딱 맞닥뜨리는 게 훨씬 흥미진진할 때가 많은 법이다.

영화 ‘메이즈 러너’

‘메이즈 러너’는 최근의 할리우드가 선보이는 새로운 경향성을 많이 답습하고 있다. 이 영화 역시 ‘헝거게임’ 그리고 ‘다이버전트’처럼 애초부터 시리즈물을 예고하고 시작됐다. 이 영화가 제일 후발 주자인 셈인데, 다른 작품처럼 모두 원작소설이 인기를 모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제임스 대시너의 3부작 소설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현재 젊은 층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영화 역시 개봉 한 달 만에 30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헝거게임’ 등처럼 이 영화도 SF다. 특히 10대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이 아이들은 20대로 성장하고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커 나갈 것인데, 배우들의 실제 이미지가 그렇게 변화될 것이다.

아이들이 주인공이니 그렇고 그런 모험담, 진부한 성장 스토리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면 살짝 오산이다. 이상하게도 이들 시리즈에는 요즘 아이들의 불만과 좌절, 미래세계에 대한 불안이 짙게 깔려 있다. 애들 영화임에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계속해서 그려내는 것이야말로 2010년대의 할리우드가 2000년대의 할리우드와 다르게 가는 전법 중 하나다. 이제 ‘해리 포터’ 시리즈는 허황된 마술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메이즈 러너’ 주인공들이 10대 전 혹은 초반의 유소년이 아니라 10대 중후반, 곧 어느 정도 자의식이 발달한 청소년들이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모순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나이라는 점에서 남다르다. 아이들은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안다. 정확하게 논리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이 세상을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나이인 것이다. 예를 들어 월 스트리트를 점령해서라도 그렇다. ‘메이즈 러너’를 즐길 만한 아이들은 ‘Occupy Wall Street’의 시대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며 영화를 ‘파는’ 할리우드는 정확히 그것을 간파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살려 내기 위해 자본주의를 없애자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메이즈 러너’의 내용은 시대와 공간이 불확실한 어딘가가 배경이다. 아이들은 이유도 없이, 기억이 삭제된 채 미로의 벽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초원 한가운데로 버려진다.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자율적으로 스스로들을 조직하고 위계와 질서를 세운다. 아주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비교적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 문제는 그들의 미래를 막고 있는 저 미로의 벽을 넘어, 어떻게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느냐의 문제다.

아이들은 자신들 중 가장 명민하고, 가장 잘 달리는 친구를 ‘러너’로 만들어 매일 아침 미로에 집어넣는다. 영화의 주인공 토마스(딜런 오브라이언)가 그런 친구다. 그러나 미로 안에는 그리버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돌아다닌다. 토마스는 다른 러너들과 함께 그리버와 싸우며 길을 찾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미로의 벽을 둘러싸고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지구는 멸망했는가. 이번 1부의 엔딩 부분을 보면 그런 일이 있었던 듯 싶다. 그리고 특출한 몇 명의 아이들을 통해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듯싶다. 그러나 그것 또한 모두가 다 의식의 조작일 수도 있다. 아직은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2부와 3부가 더욱더 흥미진진할 가능성이 커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애들 영화에 어른들이 너무 흥분할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 옆에서 긴장감에 몸을 떨며 보고 있는 어린 관객들과는 달리 일부 성인 관객은 이 영화가 자꾸 옛날에 봤던 문호 윌리엄 골딩의 걸작 ‘파리대왕’이 떠올려져 점점 차분하게 생각에 잠기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골딩도 세상의 밑바닥을 목도하고 그럼으로써 인류의 재탄생을 생각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도 기성세대의 시행착오가 반복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었다. ‘메이즈 러너’는 10대들을 위한 2010년대 판 ‘파리대왕’이다.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사진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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