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방에 살아도 입맛이야 같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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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젯밤 그이는 TV밤 프로를 보다가 배가 출출하다며 막걸리를 한 병 사오라 하였다. 일주일에 약 두 번쯤 있는 그이의 술 심부름이다.
지갑에서 2백50원을 꺼내 들고 여느 때처럼 동네 연쇄점을 찾았다.
그런데 주인 아저씨가 나를 보곤『댁의 아저씨께서는 꼭 막걸리만 자시는 모양이지요? 어쩐지 막걸리 마실 분 같이 안보이던데요』하며 술병을 건네주었다.
나는 순간 어리둥절하여『그럼 우리 애기 아빠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데요?』하고 물었더니『아, 깔끔하니 안경 끼시고 그 왜 있잖습니까?…맥주 마실 분 같이 생기셨다고 말이지요』하는 것이 아닌가. 참 재미있는 얘기도 다 듣는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내가『아저씨, 남의 셋방살이하며 빠듯한 살림 꾸려나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분수에 맞는 술을 마셔야지 어쩌겠어요? 아뭏든 우리 그이 잘봐 주셔서 고맙습니다』하며 웃고 돌아서는데『아유, 무슨 말씀을, 셋방 사는 사람이라고 맥주 못 마시란 법 있읍니까? 다들 더 잘 사 가는데요. 셋방 산다고 입맛마저 다른가요?』하며 열을 올렸다. 나는 약간 짜증이나『아무렴요. 입이 어디 다르겠읍니까? 사는 방식이 다르지요.』 이번엔 웃지 않고 정색을 하며 또박또박 대답하였다.
하긴 틀린 말이 아니다. 조물주께서 똑같이 만들어 주신 입이 어찌 다르겠는가.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충분한 자와 부족한 자의 엄연히 다른 생활조건인 것이다.
맥주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편견도 넉넉지 못한 우리의 생활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며 막걸리를 즐겨 찾는 것도 이 넉넉지 못한 우리의 생활조건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2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한 달을 세 식구가 살아 나가자면 한병 6백원 하는 맥주 대신 당연히 생선이나 계란 따위를 사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소 나는 이 맥주란 것을 사치스런 외래품을 보듯 그런 거리감 있는 눈으로 보아왔고 그래서 항상 우리 분수에 맞는 막걸리를 그이에게 권해왔다.
그이 역시 누구보다 수분지족하는 사람이라 꼭 막걸리를 애용해 주었고 나 역시 검소한 생활을 실천해 왔기에 우린 그래도 구차스럽게 남의 돈 꾸지 않고 매달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썩 잘살지 못하는 우리나라, 그 속에서도 아직 남만큼 잘살지 못하는 우리 집, 올해도 계속 그이는 막걸리를 애용해 줄 것이고 나 역시 분수에 맞는 가계를 꾸려나갈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올 한해도 검소하고 근면하고 과욕 부리지 않는 말 그대로 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아는 전통을 고수하리라 다짐해 본다. <부산시 남구 광안3동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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