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과 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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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한해가 가고 새해가 시작되었다.
별다른 감회나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새해의 나날들이다.
지난 그믐날에는 친구 사무실을 들렀다. 평소에 자주 드나들며 업무상 지장을 끼친 것이 마음에 걸려 음료수 몇 병과 몇 알의 영양제를 싸들고 여느 때처럼 들른 것이다. 그것은 지난 한해의 노고를 위로해 주고싶은 조그마한 성의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해가 바뀌는데 대한 내 감정상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어서였다.
선배 시인의 도움으로 겨우 몇 장 깔깔한 새 지폐(세뱃돈)를 바꾸어 돌아오니 광주에서 친구가 와 있었다.
차례를 지내려고 온 것이다. 혼자 온 까닭을 물은즉 부인은 구정을 지내겠다고 하여 혼자 온 것이라고 한다. 신정을 쉴 사람은 신정을 지내고 구정을 지내겠다고 해서 억지로 막으려 할 일도 아니다. 다들 살아온 방법과 생활습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어질고 갸륵한 인정 탓이기도 하지만 구정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딘가 너무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자주 못 만나고 평소에는 멀리 있지만 설날에는 찾아뵈어야 할 어른과 지기가 있다.
새해 아침 일찍부터 여의도로, 수유리로, 원효로로, 모래내로, 녹번동으로 짧은 하룻날을 바쁘게 돌다보니 뵈었던 자리마다 극히 의례적인 몇 마디의 인사말이 오갔을 뿐 깊은 마음속 정회는 나누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분들에게는 앞가림을 했지만 미처 뵙지 못한 분들에 대한 미안하고 죄스러움이 새로운 부담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할 수 없다. 구정에 가야지…』
그러고 보니 신정이다, 구정이다 설왕설래가 계속돼오고 있는 가운데 구정에 대한 관념이 살아 있는 것이 퍽 다행스럽고 편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꼬마들은 새 옷이나 음식보다는 적당한 액수의 세뱃돈이 관심사요, 신정에 방문한 손님에게는 구정을 쇤다하고, 구정 때는 신정을 지냈다는 핑계로 일상적 대접으로 체면을 가릴 수 있으니 서민생활로도 참으로 경제적이 아니겠는가.
정초에 우리들은 신년계획을 세우고 인생을 설계해 보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나 구상보다는 일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이 아니요, 새로운 문제들과의 만남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인생에 작용되는 복잡다단한 변수와 함수관계를 나는 헤아릴 수가 없다. 다만 주어진 상황과 그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삶의 최선의 방법이라 믿고 노력할 뿐이다.
올해도 신년 계획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오직 양심의 부채를 지지 않도록 나의 최선을 다할 것이며 그 결과 한해의 성취가 어떻게든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신정이든 구정이든 다음의 1년이 새로 시작된다는 것 외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름대로의「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김제현
▲39년 전남 장흥생 ▲시조 시인 ▲60년 작품『도라지』로 데뷔 ▲시집『동포』등 냄 ▲현재 장안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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