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요환의 배틀배틀] 흑, 제자에게 … 그날 난 펑펑 울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2004년 Ever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전을 잊을 수 없다. 경기가 끝나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승리의 기쁨에 들떠서가 아니었다. 패배의 아쉬움 때문이었다. 4강에서 '폭풍 저그' 홍진호(KTF MagicNs) 선수를 3연승으로 누르며 결승에 올랐다. 얼마 만의 정규리그 개인전 결승 진출인가. 그러나 결승 상대는 같은 소속사의 '치테 테란' 최연성 선수였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같이하던 그였다. 남들은 그와 나를 사제지간이라고 불렀다. 물론 지금은 스승을 위협할 만큼 훌쩍 성장한 경쟁자이기도 하다.

결승전 대진표가 정해지자 둘 사이가 변했다. 화기애애하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전술이나 전략 노출도 걱정스러웠다. 서로가 상대의 연습시간을 피해가며 비밀스럽게 훈련을 했다. 결국 연성이는 연습 파트너 고인규 선수를 데리고 아예 밖으로 나갔다. 연습실에는 나만 남게 됐다.

나는 팀 동료들에게 도움을 구하며 결승전을 준비했다. 며칠씩 밤을 새우며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짜고 익혔다. 나와 연성이,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더욱 꼼꼼한 준비가 필요했다. '틀림없이 이 전략은 통할 거야' '아니야, 이게 통할 리 없어' 수십 번씩 전략을 짰다가 뒤집었다.

드디어 결승전이 열렸다. 경기는 5전3선승제였다. 첫 경기는 연성이가, 다음은 내가, 그 다음은 연성이가, 그 다음은 내가 이겼다. 지켜보던 관중들도 숨을 죽였다. 피 말리는 승부였다.

청출어람이었다. 결국 나는 패했다. "우승자 최연성"이란 선언이 울리자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팬들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연성이의 우승을 축하해 줘야 하는데'. 그래도 눈물이 계속 흘렀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우리 사이는 서먹해졌다. 서로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사흘이 흘렀다. 그리고 TV에서 결승전 재방송을 봤다. '내가 왜 그랬을까'란 후회가 밀려왔다. 연성이는 수상 소감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한 채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미안했다. 정말 미안했다. 우승자가 패자의 눈치를 보다니. '형으로서, 스승으로서 내가 너무나 부족했구나. 연성아 진심으로 미안하다'.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나는 연성이에게 말을 꺼냈다. "마지막에 투 스타포트 전략 쓰려고 했었어?" 그제야 연성이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아니, 형이 어떤 전술로 나올지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

그날 저녁 우리는 다시 자리를 함께했다.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결승전 무대에서 못했던 말을 꼭 하고 싶다. 연성아, 진심으로 축하한다. 다음에도 결승전에서 마주치면 그땐 정말 멋진 승부를 갖자.

◆ 임요환은= .1980년생 .키 1m80㎝, 몸무게 70㎏ .별명 : 테란의 황제 .취미 : 영화감상 .임요환의 다음카페 회원수 : 56만명 .좌우명 : 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자 .게임 주종목 : 스타크래프트 테란 종족 .수상경력 : 2004년 EVER 온게임넷 스타리그 준우승, 2004년 KT 메가패스 네스팟 프리미어 리그 우승 등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