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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개가 잘 지켜 나라도 편안하겠지만…|임술 년의 개이야기|글·그림=김원룡<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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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l973년에 기르던 개를 개장수에게 팔았다. 동네 어린이를 문 죄로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었으며 그것으로 나는 개와 영영 인연을 끊었다. 개뿐이 아니고 새니 금붕어니 하는 일체 생명체는 집에서 기르지 않기로 작심한 것이다. 생명체와의 정은 언제나 허무하게 끝나기 때문이다.
밥 찌꺼기를 하루 두끼 얻어먹으면서 개처럼 주인에게 충성을 다 하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는 주인에게 정을 주면서도 그 댓가 없는 비굴한 충성 때문에 도리어 사람의 천대를 받고 가장 나쁜 욕설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온 가장 오랜 가 견의 뼈는 유럽에서는 구석기시대 후기 유적에서 나온 것이며 사람과 개의 밀접한 관계는 적어도 1만년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지난 연말 보신탕문제가 영-비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발전되었지만 개는 사냥·집 지키기 뿐 아니라 식용으로서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선사시대의 알래스카에서 사할린에 이르는 오호츠크 문화권에서도 개는 식용으로 쓰였지만 명나라의 이시진도 그의 본초강목에서 개를 갑견(사냥용), 폐견(경비용). 식견의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사냥개는 주둥이가 길고, 경비견은 주둥이가 짧으며, 식용 견은 몸이 살쪘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명견 진도 개는 단훼의 경비견에 속하는 셈인데 우뚝 솟은 귀, 짧으면서 날카로운 주둥이, 바싹 감긴 꼬리 등 외견부터가 경비의 효과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우리나라 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개 뼈도 역시 이러한 중소형의 경비견들이다.
내가 개장수에게 판 개도 순종은 아니지만 진도 종이었으며 특히 얼굴이 험상궂게 생겨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미니맹견이었다.
그전에 기르던 개들은 스스로 달아나 없어졌거나 집에 있던 가정부가 나갈 때 데려 갔으면 해서 주기도 했다.
나는 다 큰 개를 사거나 얻어 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길가에서 강아지새끼를 사오 곤 했다. 그래서 부모 모르는 아이를 입양해 온 것처럼 커 가면서 기대가 어긋나는 경우도 생기지만 강아지의 귀여움이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처음 기른 강아지는 부산에 피난 갔을 때 지금의 국립박물관장으로부터 얻은 발바리 새끼였다. 생후 얼마 안된 그 강아지는 내 양복 호주머니에 쏙 들어가서 머리만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전차를 타니까 금 시에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이 강아지에 대해서는「김덕구」라는 제목의 수필을 쓴 일이 있지만「김덕구」라는 나무 명패를 개집에 달아 주기까지 하며 귀여워했는데 서울로 올라와서 내가 몇 해 미국유학간 사이에 그만 가출하고 말았다. 이 개는 그 때 포의 동에 살고 있던 덕으로 당시의 경무대로 불려 가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역시 발바리애견과 맞선까지 보는 행운을 얻었지만 내가 몸 손질을 게을리 해서인지 그만 실격되고 말았고 장가도 못 가본 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자기 집 개는 귀여워도 남의 집 개는 무서운 법이다. 그래서 자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개는 더 으르렁거린다. 자기를 무서워할 때에는 뭔가 꿀리는 점이 있구나 하고 요 경계 인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엘 가보니까 개와 사람은 너무 상대방을 믿어서 정말로 평화로운 관계이며 길에서 만나도 서로 일체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서는 개는 아직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개는 규정에 의해서 묶여 있어야 하지만 뜨거운 햇볕에, 차가운 그늘에 24시간 묶어 놓고 그저 찬밥 한 덩이 던져 주면 그만인 것이 대개의 인심이니 개로 태어나면 보통 일이 아니다.
올해는 개 해이니 개가 잘 지켜서 집안도 편안하겠지만 개 기르는 집들에서는 좀더 개의 입장이 되어 따뜻한 마음을 쓰고 올림픽을 생각해서도 보신탕은 좀 덜 먹도록 나라에서 계몽을 시작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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