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연구원의 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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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수뇌부의 사표사태를 계기로 한국아카데미즘의 좌표와 지향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다.
그것은 정신문화 연구원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규모 국학연구의 본산으로서 78년 6월에 출범한 이후 끊임없이 논란을 부르면서도 이렇다할 성과를 국민 앞에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적잖은 회의를 동반하고 있다.
물론 정신문화연구원은 발족당초부터 일부 회의적인 관심의 초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간 연간 60억원의 예산을 쓰는 정신문화원의 존재가 국민에 납득되고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은 뚜렷한 존립의 명분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했다.
그것은 민족문화의 주체적 연구와 진흥시대에 한국학연구의 본산으로서 이 정신문화연구원이 민족의 기대와 소망을 수렴해 주리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발족이후 지난 3년의 세월동안에 정신문화원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소망은 많이 외면되었다는 솔직한 느낌을 갖게된다.
그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업적을 기대하는 성급한 업적주의신봉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이 기관의 안팎에서 일고 있는 불협화와 부정견의 요소들이 거듭 우리 앞에 실망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네차례의 기구개편이 있었고 그때마다 파상적인 불협화의 소음이 누항에 가지 들려왔던 것은 그 단적인 예다.
기구의 구성이라든가 구성원의 불협화에 앞서 정신문화연구원의 기본성격을 둘러싼 갈등들은 실상 더욱 중대한 문제다.
지금에 와서 다시 개편의 진통을 겪으며 새로운 좌표의 설정과 연구방향등의 재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접하면서 우리는 거듭 하나의 조언을 하려고 한다. 그것은 정신문화연구원의 기본성격이 앞으로 결정됨에 따라 우리 아카데미즘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줄 것을 감안해서다.
우선 첫 번째가 가능한 선택은 이기관의 본래성을 회복하여 당초의 의도대로 한국학연구기관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정신문화원은 한국학분야의 소수전문인력을 가지고 국어·국사등 순수히 우리문화와 예술의 연구와 계발에 초점을 두어 힘을 모을 수가 있다.
둘째의 가능한 선택은 한국학을 포함한 인문과학의 본산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한국과학기술원이 우리나라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의 본산으로서 착실히 성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문과학의 분야에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그런 몫을 다해주기를 바라는 기대에서다.
그런 뜻에서 사회과학분야를 독립시키거나 인문·사회과학을 통합하는 본산으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을 통괄하는데는 문제가 있다.
순수한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에 사회와 정치의 영향이 침입해 들어올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순수 아카데미즘은 그때그때 바람에 따라 변하는 정치와 사회의 풍향에 좌우되어선 존립할 수 없다.
시세에 편승해서 학문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어떤 논자들은 학문이 학문 그 자체로 있는 것은 무의미하며 실제에 이용되고 활용되어야 효용을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연구에 간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다.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학문의 연구는 실용을 위해 편향되거나 변질될 수 없는 것이다. 순수한 연구가 충실하게 이루어짐으로써 그 다음의 실용은 별도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같은 아카데미즘의 본산이 연구의 중심을 일탈해 연수의 목적으로 전용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예산낭비를 막고 번쇄를 피하자는 뜻에서 정신문화연구원을 학술원과 결합시키는 것은 가능할 수 있을지언정, 순수한「연구」아닌 다른 목적으로 아카데미즘의 본령을 벗어나는 일은 없어야겠다.
우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진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아카데미즘의 건실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모색이 이 기회에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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