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숙부처남의 권유로 영정그리려 갔다가 헛걸음|일인서장이 소문듣고 요릿집에서 환대|강릉유지 몇사람이 그림을 주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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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선전에 몇차례 입선, 화식에 장우성이란 성명3자가 오르내리자 내게는 별의별 일이 다 생겼다.
초여름이었는데 하루는 나보다 3살아래인 막내숙부의 손위처남 김형진씨가 화실로 찾아왔다.
김씨는 강릉에 잘 아는 친구가 있는데 그가『부친영정을 낸다』고 했다면서 강릉에 가자고 부추겼다.
김영진씨는 난봉꾼은 아니라도 좀 헤픈 사람이어서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데, 그가 어찌나 자신있게 말하는지 바람도 쐴겸 얼마간의 여비를 장만해 강릉행 채비를 서둘렀다.
경원선을 타고 가면서 약수로 유명한 삼방협을 지났다. 깎아지른듯한 층암절벽이 양쪽을 에워싸고 있는 골짜기를 뚫고나가는 맛이 여간 시원하지않았다.
저녁때쯤 석왕사역에 도착, 낙낙장송이 빽빽이 들어선 개천길을 따라서 한5리쯤 걸어올라가 금택여관에서 하룻밤을 잤다.
밤새도록 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잠을 설쳤다. 석왕사는 태조 이성계가 서까래 3개를 짊어진 꿈을꾸고 왕이 되겠다는 해몽을 받은 곳이어서 나도 뒤척이며 꿈생각을 해봤다.
불현듯「주인몽 세객 객몽세주인 금세이몽객 역시몽중인」(주인이 꿈꾼 이야기를 객에게 하니, 객이 또한 꿈꾼이야기를 주인에게 하더라. 이제 꿈 이야기를 한 두사람이 역시 꿈속의 사람이다)이라고 한 서산대사의『삼몽사』란 글이 떠올라 그 뜻을 생각하느라 부심했던 그때 일이 지금도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이튿날은 안변으로 나와 동해북부선을 타고 내려왔다. 왼쪽은 동해의 맑은 물이, 오른쪽은 육지인대 어떤 때는 기차가 바다위로 가는 것 같았다. 동해물이 어찌나 파란지 하얀 사기대접에 초록물을 푼것 같았다.
고저 총석정을 지나 소나무가 모래사장에 죽 늘어서있는 송전해수욕장을 거쳐서 기차는 외금강역에 멎었다.
역마당이 온통 모래사장이어서인지 승객들이 모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온정리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일본여관에 들었다. 목욕을 하고 나왔더니 옷을 갈아입으라고 착착접은 유가다2장을 갖다 놓았다.
나는 어쩐지 그 옷이 섬뜩하고 어색해서 입지않고 런닝셔츠 바람으로 앉아 있었는데 김영진씨는 냉큼 주워입고버티고 다녔다.
다시 외금강역으로 나와 기차로 양양까지 가서 내렸다. 그때는 양양까지밖에 기차가 다니지않아 강릉을 가려면 여기서부터는 버스를 타야했다.
강릉에 가서는 읍에 여관을 정해놓고 김영진씨가 영정을 내겠다고 한 강릉근교의 김봉기씨집에 찾아갔다.
김씨는 우리들을 후히 대접했지만, 부친영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김영진씨가 거것말을 한 것 같이 되어서인지 안달을 했다. 넌지시 영정이야기를 꺼냈지만 주인은 냉담했다. 나는 속으로『이거 다 틀렸구나』하고 단념, 미끄러진김에 쉬어간다고 구경이나 하고가자고 오기를 부렸다. 하지만 호주머니가 가벼워 호기는 이내 한풀 꺾이고 말았다.
경포대도 가보고 오죽헌도 구경했다. 바닷가에 나가 문어를 쪄서 쇠고기처럼 쓱쓱 썰어파는 것도 맛보고, 대나무그릇에 담아놓은 싱싱한 전복도 사먹었다. 사불여차하면집에 전보라도 쳐서 여비를 부쳐받을 셈치고 뱃심을 두둑이 가졌다. 김영진씨가 추락한 위신을 만회하려고 중추원 삼의로 있는 강를최씨문중의 거물 최준집씨와 연결시켰다. 최씨는 만석부자인데 우리를 청해서 술상을 내고 사당을 자랑했다. 사당은 두리기둥으로 잘 지어놓아 으리으리했다.
나는 혹시 사당에 모실 영정이라도 부탁하려나하고 기대했지만 전혀 그럴기미가 없었다. 그가 사업을 하면서 경성일보 강릉지국장으로 있는 계씨인 최위집씨를 소개해줬다. 최위집씨는 선들선들했다. 대뜸 병풍 한채(10폭)를 주문해 나는 여관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이때 마침「장고봉사건」(1938년여름 두만강하류 만주·조선·소련국경교차점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국경분쟁으로 공방전을 벌인 사건)이 일어나 여관에도 임검이 심했다.
하지만 나는 화가여서인지 성가시게 굴지않았다. 임검나온 순사가 조선화가한사람이 여관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보고했던지 이소문이 경찰서장 귀에까지 들어가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일본인 경찰서장은 우리를 요릿집에 초대해 저녁과 술을 내면서 환대했다.
이런저런 소문이 퍼져 강릉인사 몇사람에게서 그림주문이 들어왔다.
최위집씨도 병풍그림을 받고는 후한화대를 보내왔다. 그럭저럭 강릉에서 달포나 묵었더니 싫증도 나고 서울일도 궁금해서 미수금은 김영진씨에게 맡기고 나먼저 상경할 준비를 했다.
강릉을 떠나면서 생면부지인 경찰서장의 후의에 답례하는 뜻으로 두방 그림 한점을 선사했더니 그도 차부까지 사람을 내보내「촌지」라고 쓴 흰봉투를 내놓았다.
양양에서 기차를 타고 칠흑같은 밤에 삼방협을 지났는데 조각달이 걸려있어 시심을 돋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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