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중소기업 핑계대며 국민 세금 낭비할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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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부가 지급불능 위기에 빠진 기술신용보증기금(이하 기보) 살리기에 나섰다. 신용보증기금에 대한 민간금융회사 출연금을 기보에 몰아주자는 방안이 제시되는가 하면 내년에 출연할 재원을 미리 한꺼번에 내라는 요청까지 나온다. 기획예산처가 정부출연금을 추가로 내놓기를 꺼리면서 나온 편법들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기보의 보증 재원을 충당하는 일이 과연 온당한지,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보증제도를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정부마저 추가로 돈을 내놓지 않겠다는 판에 민간 금융회사들의 돈을 끌어들여 위기를 모면하고 보자는 발상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처사다.

사실 기보의 부실화는 출범 때부터 예상됐던 일이다. 이 기관의 설립 자체가 정치적인 계산에서 출발한 데다 정권이 바뀌면서 이를 오.남용하면서 부실을 증폭시켰다. 이 기관의 설립은 YS정권 때 부산 지역에 대한 정치적 배려 차원에서 결정됐다. 그 후 DJ정권에 이르러서는 벤처기업 지원창구로 이용되면서 대규모 부실의 싹을 키웠다. 이른바 프라이머리 자산유동화증권(CBO)을 통해 사업성이 의심스러운 벤처기업에 대한 보증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2조2000억원의 원리금 가운데 7525억원을 대신 물어주고, 나머지 1조4475억원도 회수 가능성이 절반에 못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증을 섰다가 대신 물어주는 보증사고율이 11.7%에 이른다는 것은 정상적인 금융회사로서는 상상도 못할 수치다. 민간 금융회사라면 결코 돈을 대지 않을 사업에 중소기업.벤처기업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보증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떼인 돈은 국민의 세금(정부출연금)으로 메우거나 민간 금융회사를 윽박질러 돈을 추렴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날린 돈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 꼬박꼬박 세금을 낸 일반 국민이나 은행에 돈을 맡긴 보통-사람들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판이다.

지금부터라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돈을 대줄 게 아니라, 이런 기관을 계속 존치해야 할지를 철저히 따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