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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막에 남는 것은 인간의 따스한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해마다 이맘때 우리는 또한번 하나의 결별과 마주한다.
한햇동안 자주 들여다보며 약속시간과, 만나야할 사람 이름과, 잊혀져가는 기억력을 일깨워 주던 달력을 우선 벽에서 떼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한햇동안 익숙해 있던 『신서년, 81년도…』과도 이별을 고한다.
또 한살의 나이와 한 학년 배지와 1년동안 경력같은 것들이 서둘러 금을 굿고 마감을 고한다.
어린날은 한해가 길고도 멀었고, 해를 거듭하면서 적당히 미끄럽더니 이제 너무 쏜살같아 현기증이 인다.
크고 작은 헤어짐에 상당히 익숙해있는 우리지만 떠나고 떠나보내는 이별이란 형태는 분명 마음 스산한 일이다.
『세월은 가고 인정만 남고…』 그래서 이 해질녘에 건질것은 인간의 따스한 정겨움뿐이란 말인가. 서로 부르고 찾고 도와가면서 얼어붙은 이땅의 이웃들은 추위를 잠시 잊는다.
가는것과 남아있는 것과의 구분을 위해 높고 낮은 곳에서 종이 운다. 머뭇거릴 시간의 미련을 떨치기 위해 종은 거듭 울어댄다.
어젯날 시작을 알리던 그 청아한 같은 소리로 종은 겨울 들판의 우리를 부른다.
그리고 망각이나 착각같은 어둠에서 일깨워 준다. 다시 기다리며 사는법을 깨우쳐 주기도 한다.
커다란 쇠북 종이 걸려있는 종탑을 둘러싸고 지우개로 두번만 긁어도 찢어지는 공책에 시를 쓰며 한때 우리는 풍요로왔었다.
고속화에 떠밀리듯 빠르게 크는 원색시대의 아이들이 모르는 설화처럼 풋풋한 고드름의 계절, 구만리라 여기던 내일을 우리는 얘기하며 좋아 했었다.
물론 종은 더욱 맑은소리를 내고 있었고 첫편지를 나누어 읽던 우리는 오래 떨면서 드디어 하나의 약속을 만들어 냈다. 변모하지 않은 그대로 지내기로. 다만 그렇게 살기로.
그후 종은 울지않고 울어도 들리지않고, 소리가 녹슬었는가, 귀 먹어 들리지 않는가, 삶의 심전이 무거워 떨림이 없어졌을 때, 적막강산에 몇날 며칠 눈만 오더니 소식이 끊겼다.
영 영 봄을 잃어버릴 것만 같던 길고 긴 겨울을, 종은 멀리서 이따금 착각처럼 소리내면서, 차라리 알맞게 잊어버리고 사는 편리한 습성을 일러 주었던가. 그래서 우리는 모두 건강했다.
가뭄에 타들어가면서 손금처럼 갈라지는 논바닥에, 물 길을 방울로 짜서 대어주면 목마른 밤, 우리는 여태 홀로 살지 않았다는 고마운 실증을 비로소 발견했다.
해는 많이도 짧아졌지만 종이 한장의 벽을 허물어버리면 이웃은 더욱 따스해질수 있다는 가능성에 들뜨기도 했다.
사할린 교포는 30년만에 혈육을 만났다. 우리는 모두 더운 눈시울로 그 현장의「오누이」를 지켜보면서 살아있음으로하여 얻는 축복을 향해 감사했다.
소련의 물리학자「사하로프」며느리의 출국 허가도 마찬가지다. 먼나라 이야기지만 손을모아 열띤 갈채를 보냈다.
얼마나 괜찮은 일인가,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이만하면 수없는 좌절을 극복하고도 한번 살아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이 아닌가.
생의 어느 지점이라고 기억해 낼수는 없지만 이 삶의 커다란 한 부분을 도난이라도 당한듯 성큼 이 낯선 고비에 우리는 와 서있다.
다시 시작해보라고 해도 결국 이 비슷하게 걸어올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어린날의 종소리는 오늘 무겁게 내려지는 막간에서 자주 청아하다.
◇약력 ▲1936년함북길주출생▲동국대 영문과·건국대대학원국문과졸업▲58년 「현대문학」지 통해 등단▲현재청주대·양명여사대 강사▲시집 『내실』 『주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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