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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In&Out 레저] 흐르는 강물에 남북이 있던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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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의 과거는 녹음 속에 묻혀 있다.

문산에서 철원까지 가는 길, 무기의 숲을 헤치며 이념의 철조망을 넘어온 임진강은 서해로 나가고, 나는 아카시아향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오른다.

짙어가는 산하에 서늘한 쇠 비린내와 싸늘한 긴장감은 없다. 스쳐가는 군용트럭과 군데군데 꽂힌 부대팻말이 아니라면

길은 이 땅의 어느 곳과도 다르지 않다. 적대의 반세기를 건너 겨우 이은 한 가닥 길을 따라 비료 실은 트럭은 북으로 가고 냄비 실은 트럭은 남으로 온다.

길은 이제 분단의 경계가 아니라 화해의 출발선이다.

길은 가까우나 멀다. 서울에서 한 시간이라는 지리적 거리보다 대치의 접점이라는 심리적 거리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케이드가 걷히고 검문소가 뒤로 물러나면서 많은 게 변했다. 길가의 집들은 새 단장에 바쁘고 신탄리역 앞의 안보관광회사는

지난해 문을 닫았다. 새끼돼지 60마리를 훔쳐가는 걸 본 사람 없느냐는 현수막이 씁쓸하다. 길은 풍경을 바꾸고 사람살이도 바꾸어 놓았다.

그래도 주말이면 미어지는 여느 길과 달리 여기는 아직 호젓하다. 배를 드러내고 일렁이는 미루나무 사이로 연둣빛 어린 벼가 부드럽고, 감자가 하얀 꽃대를 올리며 여름을 부른다. 총검의 길, 역사의 길을 따라가는 여정의 끝은 도피안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55번째 6월이다. 마침 한국관광공사는 이 길의 서쪽 끝인 파주 일대를 이달에 가볼 만한 곳 중의 하나로 선정했다.

연천.철원=안충기 기자<newnew9@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눈을 씻고 태풍전망대

태풍전망대에서 하늘은 아득하고 땅은 가득하다. 해발 264m의 내륙에서 하늘과 산하가 맞닿은 모습을 볼 수 있구나. 강은 비무장지대를 굽이치며 흘러오고 겹겹이 둘러친 산들은 시야 밖으로 물결치며 흘러간다. 임진강이 처음 남한 땅으로 유입되는 전망대에서 휴전선까지는 800m다. 그러나 휴전선은 비무장지대 안에 그어진 임의의 선일 뿐, 아무런 표시가 없다. 과장된 자찬과 적대의 비방을 쏟아내던 확성기가 꺼진 철조망의 이쪽과 저쪽은 적막하다. 다가오는 밤을 준비하며 병사들은 곤히 잠들어 있다. 세 군데의 초소를 지나야 전망대에 닿는다. 첫 초소에서 신분증을 맡기고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는다. 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연천에서 꺾어 들어간다. 전망대에서 나오는 삼곶리 길가에는 물맛 좋은 샘이 있어 반갑다. 열쇠전망대는 대광리에서 들어간다.

마음을 닦아 도피안사

경의선 종착역인 신탄리를 지나면 점점 좁아지던 협곡이 한순간에 소멸하며 광활한 들이 펼쳐진다. 강원도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철원평야다. 궁예의 꿈이 여기서 스러졌고 숱한 젊은이들이 반세기 전에 이 들에서 목숨을 앗겼다. 3번 국도가 시작되고 끝나는 점을 돌아 아카시아 숲 속으로 난 호젓한 길의 한쪽에서 도피안사(사진(左))는 꿈처럼 나타난다. 스님 두 분이 지키는 절은 이름만큼이나 예쁘다. 절은 야트막한 화개산의 능선 안에 포근히 안겨 있다. 천하명당의 자궁터라는 설명이 아니어도 절집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다. 산문을 비껴 앉은 대적광전에서 몇 걸음 옮기면 살짝 열리는 틈으로 너른 들과 그 너머의 금학산이 일직선으로 내다보인다. 주지스님은 이 작은 절이 낙산사,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강원 3대 사찰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절의 적막을 깨는 것은 아침의 새소리와 한낮의 개소리와 저녁의 개구리 소리다. 그들의 놀이 시간을 구분 짓는 것은 범종소리뿐이다.

500년 넘은 느티나무 풍성한 가지가 마당에 드리운 절집은 지금 중창불사 중이다. 하지만 절집이 몇 채 더 들어선다고 그 본래의 아름다움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어쩌자고 모든 번뇌가 사라진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에 이르는 길이 피가 튀고 살점이 찢겨 나가던 아수라의 한복판에, 강의 이쪽 세상에, 미혹의 한가운데 자리 잡았단 말인가.

풍경을 담다 임진강 지류

강은 길을 동무 삼고 길은 강에 기대어 흐른다. 강과 길이 만나는 곳은 어김없이 절경이다. 태풍전망대 앞에서 숨을 돌린 임진강은 화석정 앞에서 유순하다. 성급한 이들은 벌써 강가로 나왔고 강태공들은 강 가운데까지 나갔다.

장남교 아래 두지리 선착장에서는 고랑포까지 오가는 황포돛배를 탈 수 있다. 수직으로 솟은 좌우 20m 높이의 절벽을 감상하는 뱃놀이 45분은 색다르다(어린이 5000원, 어른 8000원, 031-958-2557).

강의 지류 곳곳에는 수려하나 알려지지 않은 계곡이 숨어 있다. 10㎞가 넘는 연천의 동막골은 그중 하나다. 물이 맑고 깊지 않아 아이들과 함께 찾기에 그만이다. 이 계곡의 발원지인 고대산은 민간인이 오를 수 있는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산이다. 신탄리역에서 계곡을 따라 2시간이면 오른다. 정상에 서면 중부 내륙을 관통하는 산맥과 드넓은 철원평야가 눈에 꽉 찬다.

이 길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가 농축되어 있다. 전곡에는 구석기, 당포성터와 경순왕릉에는 삼국, 숭의전에는 고려, 화석정에는 조선의 숨결이 묻어 있다. 경순왕릉은 경주 아닌 곳에 모셔진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여정의 양끝인 임진각과 고석정에서는 한국전쟁 때 쓰인 갖가지 무기를 볼 수 있다.

임진각에서 도피안사까지는 천천히 가도 2시간이다. 하루 나들이라면 가고 오는 길에 들를 곳을 미리 정하고 떠나는 게 좋겠다. 군부대 전망대나 경순왕릉에 가려면 출입통제시간을 잊지 말 일이다(태풍전망대 오전 9시~오후 5시, 경순왕릉 오전 10시~오후 5시. 신분증 꼭 지참). 하룻밤 이틀 낮 여정이라면 동송이나 고석정 근처에서 자는 게 편하다. 전적지를 돌아보려면 고석정 관광지 안에 있는 철의 삼각전시관(033-450-5558)에서 신청한다. 승용차로도 돌아볼 수 있다. 제2 땅굴, 승리 전망대, 월정리역 등을 둘러보는 데 2시간30분 걸린다.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민물고기와 다슬기를 내놓는 식당이 많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엔 할머니들이 산나물 좌판을 벌이고 있다.

초행이라면 연천군청과 철원군 고석정에 들러 관광안내지도를 받아 다니시길. 아기자기한 정보가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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