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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 뒤덮는 촉각 숟가락이 이토록 에로틱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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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22면

살다 보니 내게도 TV에 출연할 기회가 주어졌다. 디자인과 예술을 아우르는 토크 프로 ‘디어헌터’의 공동패널이 몫이다. 미녀 도예가와 세상이 다 아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디자인 잡학다신으로 불리는 평론가와 함께 펼치는 입담의 재미는 쏠쏠했다. 더 재미있는 일은 프로를 진행하며 만났던 이들이다. 도대체 이런 디자인이 어떻게 가능할까? 감탄은 당연하다. 이전에 없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아티스트들로 세상은 풍요로워진다.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3> 전진현의 공감각 숟가락

추위로 벌벌 떨며 녹화한 날 눈이 번쩍 뜨일만한 물건을 만났다. 공감각 숟가락이다. 숟가락을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 비아냥거리지 말기 바란다. 공감각이란 단어의 뜻을 먼저 알아두는 게 예의다. 인간은 독립적이면서 서로 연결된 감각을 지녔다. 음악을 들으면 풍경이 연상되고 살갗의 감촉이 엉뚱하게 음식의 맛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떠올려 보라. 한 감각의 자극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되고 확장되는 상태를 공감각(Synesthesia)이라 이해하자.

전진현(33)이란 디자이너가 만든 숟가락은 출연자 모두를 경악케 했다. 음식을 뜨기 위해 쓰는 숟가락에 움푹 패인 부분이 없다. 꼬리를 단 듯한 손잡이에 달린 둥그런 공이 전부다. 남성의 정자 혹은 여성용 성인 용품인 딜도를 연상시키는 물건이 숟가락이란다. 그나마 움푹한 것은 입속을 매끄럽게 드나들어야 할 표면에 껄끄러운 돌기를 달았다. 바닥엔 기괴한 굴곡까지 있다. 눈앞에 놓인 숟가락들은 엽기, 변태 성향의 인간들이 쓰는 의식 용품 같았다.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내용을 모르고 디자이너가 열심히 만든 작품을 엽기와 변태로 오해하면 실례다. 직접 사용해 보기로 했다. 공 모양의 숟가락은 꿀 같은 찐득한 액체를 묻혀 빨아먹는 용도다. 한 입 가득 물린 숟가락은 매끈한 감촉으로 입천장, 입술과 치아의 안쪽을 농락했다. 쭉쭉 빨면 빨수록 입안은 에로틱한 자극으로 넘쳤다. 아니다. 어머니의 젖꼭지를 입안 가득히 물고 오물대며 젖을 빨던 어린 시절의 충족감이다. 지금까지 왜? 숟가락을 떠먹는 데만 사용했을까. 이상한 반성은 자연스럽다.

또 다른 숟가락으로 국물을 퍼먹어 보았다. 끝 부분을 둔덕으로 처리했다. 솟아오른 만큼 용적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가득 채워도 다 차지 않는 숟가락은 대신 입속에 더 오래 머문다. 둔덕이 장애물로 변해 숟가락이 쉽게 빠지지 않는 탓이다. 국물의 맛이 혀 안에 퍼지는 동안 봉긋한 굴곡은 윗입술의 안쪽과 언저리를 자극한다. 맛과 눌러지는 압각의 동시 반응은 의외로 신선하다. 국물을 퍼먹는 내내 입술은 낯선 감촉과 질감으로 색다른 놀이를 벌이는 중이다. 이제 먹는 즐거움은 미각만으로 모자란다.

숟가락 자루도 둥근 것, 불룩한 것, 움푹 패인 것, 까칠한 것으로 다양하다. 상전이 배부르면 종들 배고픈 줄 모르는 법이다. 입이 상전이면 손가락이 종이다. 먹는 즐거움에 동참하지 못했던 손가락은 그동안 억울하게만 살았다. 숟가락 자루는 이제사 배려의 몸짓을 취했다. 닿는 부분의 돌기와 움푹 패인 홈은 손가락 몫이다. 돌기의 자극과 굴곡의 홈에 닿은 엄지손가락은 잊었던 쾌감의 복원으로 강렬해진다. 남자가 잡으면 여자의 그것 같고 여자가 잡으면 남자의 그것 같다. 촉각의 성적 대치는 미각의 즐거움을 손가락까지 나누어주는 평등을 실천한다.

입속의 소외된 부분을 자극하는 아이디어
인간의 감각에 우열이 있을 수 없다.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의 입장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그동안 보고 듣고 피부로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는 일차적 오감만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얼굴의 감촉에 가려 소홀했던 목 부분은 버려두어도 되는 것일까. 맛이 중요하다면 혀 이외의 입천장과 잇몸, 입술은 왜 배려하지 못했을까. 수 없이 잠자리에 들면서 허벅지와 무릎, 등 부분은 왜 무시하고 내버려 두었을까. 주워온 자식 취급했던 나머지 감촉도 소중한 자식이긴 마찬가지다. 새로운 숟가락은 그동안 묻혀있던 감각의 회복을 되짚어 보게 했다.

눈을 가리면 보이지 않아 불편하다. 대신 촉각이나 후각이 예민해 진다. 모든 인간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감각의 상호보완 능력이다. 아이들은 눈을 감고도 온몸으로 느낀다. 본연의 공감각이 활성화된 상태인 까닭이다. 커 가며 인위적 생활습관으로 필요한 감각만을 사용하게 된다. 쓰지 않는 더 많은 부분은 당연히 퇴화되게 마련이다.

공감각 숟가락은 먹는 것에 집중되어 가려진 촉각을 부활시켰다. 밥 퍼먹는 도구에 머물렀던 기능을 뒤집어 스스로 감각의 대상이 되고 다른 자극을 전하는 메신저가 된다. 이들 숟가락은 낯설고 때론 불편하며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이전에 없던 물건이니 당연할지 모른다. 새로운 디자인은 지금까지 익숙했던 먹는다는 행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주문한다.

“호기심으로, 다르게 생각했을 뿐”
전진현을 만났다. 당찬 젊은이의 총기는 대단했다.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을 자신의 작업으로 옮기는 일이 특기다. “호기심으로 세상을 보라.” “다르게 생각하라.” 세상을 앞서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공통의 조언이다. 젊은 디자이너는 이 말을 흘려버리지 않았다. 감각의 실체를 알기 위해 스스로 호기심을 향해 다가섰고 익숙함에 의심을 보냈다. 판에 박힌 지시와 결과를 예측하고 던지는 명령에 익숙한 국내에선 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굴레를 벗어버린 홀가분함에서 공감각이란 낯선 분야가 관심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인간의 쾌감을 위한 장치가 가장 촘촘한 나라 네덜란드의 영향이다. 세계에서 마약이 합법적으로 인정되고 섹스를 산업으로 발전시킨 흔치않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약 중인 배경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환경과 분위기가 인간의 사고를 성장시키는 사례인 때문이다. 한국에서 수줍음을 타던 처녀 디자이너가 거리낌 없이 성적 연상이 짙은 공감각 숟가락을 만들어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자유로움과 개방성의 힘이다. 스스로 피실험자가 되어 내면의 감각을 일깨우고 적용했던 시간의 결과물은 훌륭했다. 곧 세계의 사람들이 전진현의 숟가락을 입에 물고 쭉쭉 빠는 일상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윤광준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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