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감동이 버무려진 영화 ③ 크리스 에반스가 조선 유생이 된다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나’(크리스 에반스)는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다. 유려한 말솜씨에 훤칠한 외모까지 갖췄다. 액션 블록버스터의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그에게 덜컥 로맨틱 코미디 시나리오가 일감으로 주어진다. 사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해 본 적 없다. 어떻게 사랑 이야기를 써야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이런 ‘나’의 눈에 눈웃음이 무척 매력적인 ‘그녀’(미셸 모나한)가 들어온다. 외모만 아니라 성격까지 매력적이다. 실없는 농담에도 재치 있게 응수한다. ‘나’는 부지런히 ‘그녀’ 주변을 맴돌지만, ‘그녀’는 이미 돈 많은 남자와 약혼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구애를 해보지만 나를 그저 편안한 친구로 대하는 ‘그녀’ 때문에 ‘나’는 처음으로 가슴앓이를 한다.

‘타임 투 러브’는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 없는 시나리오 작가가 갑자기 짝사랑을 하게 되면서 겪는 혼란을 경쾌하게 그린다. 주인공 ‘나’는 이제껏 여자들의 사랑 고백에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널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아”라고 대꾸할 정도로 공감 능력 제로인 캐릭터.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갖지 못하는 탓에 이 여자 저 여자를 오가며 일회성 만남만 거듭해왔다. 그 배경에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림받았던 아픈 과거가 있다. 감독의 말을 빌리면 “불에 데일까 겁나서 불가의 따뜻함마저 포기해 버리는” 방어적인 남자다. 늘 쿨한 척 하지만 마음 속은 상처투성이인 ‘나’는 ‘그녀’를 만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사랑의 열병을 경험한다. ‘그녀’를 향한 사랑을 계기로 나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서서히 돌린다.

이 로맨틱 코미디의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는 매번 엉뚱한 사랑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하는 ‘나’의 기상천외한 분장이다. 주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의 답 없는 연애에 훈수를 두며 저마다 각자의 조언을 뒷받침할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 ‘나’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 자신과 ‘그녀’를 대입시킨다. 제복을 입은 해군이 되어 ‘그녀’와 춤을 추고, ‘그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잊기 위해 중세시대 수도승으로 출가하고, 산소가 떨어진 우주비행사로 등장해 짝사랑의 숨 막히는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캡틴 아메리카의 늠름한 이미지를 과감하게 무너뜨리는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가 능청스럽다. 친구 맬러리(오브리 플라자)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선 여장까지 불사한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발랄한 이 영화에 가슴 짠한 대목이 등장한다. ‘그녀’의 사랑을 통해 변해가는 ‘나’의 모습을 그릴 때다.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나’는 홀로 시리얼을 먹는다. 어릴 적 엄마가 시리얼 상자에 붙이고 떠난 작별 인사 때문에 어른이 되도록 손도 대지 못했던 그 시리얼이다. 진정한 사랑으로 오랜 마음의 상처를 회복한 ‘나’는 이제 남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상상하는 대신 자신만의 러브스토리를 당당하게 써나간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을 막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곳곳을 동분서주하다 마침내 ‘그녀’를 만나 고백한다. “사랑은 뒤죽박죽이야. 혼란스럽고 무섭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지금 널 보고 있으니 다 감수할 수 있겠어. 실수일 수도 있고 서로 비참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기회라도 주어진다면 기꺼이 널 만나 평생 후회하면서 살래.” 과연 ‘나’와 ‘그녀’의 사랑은 그린라이트일까. 끝까지 지켜볼 일이다.

이런 관객에게 추천!  연애를 글로 배운 당신에게 추천. 영화 속 ‘나’처럼 다양한 사랑에 빙의해 볼 기회다.

짝사랑에 번민하던 ‘나’는 갑작스레 할아버지의 죽음을 맞는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나’는 그동안 친구 스콧(토퍼 그레이스)이 입이 마르도록 찬양하던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는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 주인공이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끝없는 바다를 유랑한다는 내용이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 요트 위에 친구들, 할아버지, 사랑하는 ‘그녀’가 있는 모습을 차례로 상상한다. “평생 배 위에서 보내야 한다면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라고 자문하며 그들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는 ‘나’.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의 친구 스콧은 누군가 가져가 읽게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공공장소에 일부러 두고 가는 로맨티스트다. ‘나’의 연애에 훈수를 두는 친구들 틈에서 스콧은 최근에 본 한국 드라마를 예로 들며 “사랑은 진짜”라고 주장한다. 이번에도 ‘나’는 스콧의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한다. 이 한국 드라마의 제목은 ‘배꽃이 피면 눈물도 흐른다’. ‘나’의 상상 속에서 ‘나’는 조선 시대의 유생으로, ‘그녀’는 기생으로 등장한다. 서로 더듬더듬 한국어 대사를 읊는 두 사람. ‘나’의 내레이션 때문에 뚜렷이 들리지는 않지만, 귀를 기울이면 한국어 대사가 제법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슴이시오?”

친구 사이의 ‘우정 데이트’를 핑계 삼아 함께 수퍼마켓을 찾은 ‘나’와 ‘그녀’. ‘그녀’는 오늘이 자신 생일이라면서, 고심해서 생일카드를 고른다. 사연인즉 이렇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릴 적 그녀의 생일을 앞두고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자살했다. “사랑은 가끔 엉망진창이기도 해요. 그래서 매년 제 생일이면 아빠가 보냈을 만한 걸 골라 아빠 이름으로 보내요.” 역시 어릴 적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조금은 갑작스럽지만, 위로의 말을 건네듯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키스다. 이번만큼은 ‘그녀’ 역시 말없이 ‘나’의 진심을 받아들인다.

글= 매거진M 고석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