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럽헌법안 부결] 시라크 '정치적 자살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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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에서의 유럽헌법안 부결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몰락하고,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우뚝 일어섰다.

시라크 대통령의 몰락은 과욕에서 빚어졌다. 지난해 11월 시라크 대통령은 의회에서 표결 처리해도 되는 헌법안 비준을 굳이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선언했다. 2007년 대선을 겨냥한 결정이었다. 당시만 해도 헌법안이 당연히 통과될 것으로 전망됐다. 대통령의 인기도 좋았다. 헌법안 찬성의 여세를 몰아 대통령 3선에 성공하겠다는 것이 시라크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헌법안 찬반 논란이 본격화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시라크 대통령은 정치적 자살골을 넣은 셈이 됐다. 이달 초 대통령 재임 10년을 맞은 시라크 대통령은 40년 정치 생애에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대통령 3선의 꿈도 거의 날아갔다. 그러나 하야는 하지 않고, 총리를 경질하는 내각개편으로 돌파구를 찾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반면 블레어 총리는 어부지리를 얻게 됐다. 유럽통합론자로 평소 유럽헌법안 비준을 강력히 주창해온 블레어가 정치적 생명을 걸어야 할 위기를 시라크 덕분에 넘기게 된 셈이다. 영국은 유럽연합에 가장 비협조적인 회원국이다. 따라서 내년 상반기로 예정된 헌법안 국민투표는 부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블레어는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유럽의 핵심인 프랑스에서 먼저 부결됨에 따라 블레어는 "헌법안 채택은 물건너 갔다"며 국민투표를 취소할 명분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두 사람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2003년 초 이라크전을 앞두고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 채택을 시라크 대통령이 거부해 블레어가 정치적 치명타를 입었다. 그러나 이번에 시라크가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입음에 따라 차기 유럽연합 대통령을 노리는 블레어는 뜻밖의 일석이조를 얻게 됐다.

런던=오병상,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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