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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윤 스님|젊어서 노령을, 늙어서 청춘을 생각하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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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간이란 본시 이치에 따라 선악을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동물과는 달리 만물의 영장이라는 칭호를 붙여준 근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인류의 정신사가 시작된 것은 영적 자각이 있은 이후의 일이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고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된 것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도 결국 그 사람의 격조에 따른 교양과 태도에서 여러 차등이 있을 것임 엔 틀림없지만.
현대의 복합적인 산업사회의 소음속에서 대중은 물량과 화폐에 매력을 느끼고 동분서주하는가 하면 호사스런 삶을 희구하며 생각하는 생활을 기피하는 풍조가 날로 짙어만 가는 것 같아 적이 불안감을 느낀다.
사색하며 산다는 것을 고역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삶을 포기할만한 용기도 가져야할 것이다.
특히 종교인들 가운데도 사색과 담을 쌓아 버리고는 세속적 잡사에만 정열을 쏟는 그런 얄팍한 따위의 사이비교역자들이 없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이란 역사적 흐름과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면서 살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시공을 초월한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에 파고드는 의욕과 깨달으려는 구도자적 본분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기만의 소아에 집착, 스스로만이 살고자 하는 인간들이 많은 까닭에 이 사바세계는 항상 괴로움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
자기만이 잘 살아 보겠다고 허위적거리는 집착은 물론 아집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스스로를 괴로움의 그물에 옭아매는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이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모든 인간이 나만 잘 살아야 한다는 이기심 때문에 사회현실은 돈·권세·지위·명예 등등으로 괴로움의 거센 물결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욕망의 굴레속에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빼앗긴 채 거대한 메커니즘의 물결에 떠다니는 부평초같은 모습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많은 현대인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생존하기 위한 수단에만 집착, 힘이 정의이고 강자의 덕이 미화되고 있는 가치전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의 자화상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지금처럼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고 창조하기 위한 인간지혜의 확산이 절실히 요청된 적은 없다고 본다.
동서고금의 모든 성인이나 현철들이 수천년동안 모든 인류에게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나 또 괴로움을 이겨나가는 길을 여러가지로 밝혔으니 거개가 스스로를 닦는 극기의 도요 그 방변들인 것이다.
불타는 청춘에서 노령을 보고 또 노령에서 청춘을 보았으며 삶에서 죽음을 보고 죽음에서 동시에 삶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타는 이기적인 집착을 버리고 진리가 그 자신의 빛을 장애없이 통과시키도록 청정의 덕을 쌓으라고 가르쳤으며 진리 자체와 합일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초월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또 불타는 인간이란 미혹 망상으로 무명 잡초만 자라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마음 밭의 무명초를 제거하여 지혜의 씨앗을 뿌리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중생은 누구나 양질의 심전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이 심전을 노력하여 개발하지 앓기 때문에 항상 고해와 화택의 세계에서 헤맨다고 탄식하신 것이다.
자비스런 마음으로 탐욕을 없애고, 비심을 일으켜 성냄을 끊고, 기쁨을 내어 능히 슬픔과 어리석음을 멀리해야 소아의 집착을 벗어나 대아의 대승 보살이라고 했다.
또 중생의 근기에 맞춰 신앙과 실천의 심도에 따라 그 누구라도 자기 분에 맞는 해탈의 법열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참으로 오늘의 문명산업사회인들에게는 깊이 음미해 볼만한 진리의 모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인의 가장 큰 불행은 인간자신이 인간다움을 상실해 간다는 사실이다. 가장 자유인이어야 할 인간이 비인간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우리 인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920년 서울 출생▲봉원사강원 사교과졸업 ▲불교태고종사회·재무부장역임▲불교태고종 종회의원 ▲현태고종 봉원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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