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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100돌 맞은 조선호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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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을 등지고 남산 방향을 바라보자. 서울광장 건너편에 플라자호텔이 서 있고, 왼쪽으로 다른 건물이 앞을 가린 조선호텔이 살짝 보인다. 조선호텔에서 남산 방향으로 움직이면 한국은행과 신세계백화점이 나오고, 한국은행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숭례문과 서울역이 차례로 나타난다.

믿기 어렵지만 이 풍경은, 1976년 개관한 플라자호텔만 빼면 얼추 백 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1900년대 초반 경성(京城) 한복판의 풍경은 2014년 서울의 풍경과 놀랍게도 비슷하다. 서울의 근대화가 100년 전 그 즈음에 꼴을 갖췄기 때문이다.

앞서 열거한 건물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위치와 용도는 달라진 게 없다. 이를테면 서울시청은 경성부청, 한국은행은 조선은행, 신세계백화점은 미츠코시(三越) 백화점이었다. 숭례문도 일제 강점기에는 남대문이라 불렸고, 서울역도 그 시절에는 경성역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이름이 바뀌지 않은 건물이 있다. 조선호텔이다. 백 년 전 이름은 ‘경성조센호테루’였고 지금의 정확한 이름은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이지만, ‘조선’이라는 호칭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름만 그대로가 아니다. 조선호텔은 백 년 전에도 그 자리에서 여행자를 받아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웠다. 4층짜리 붉은 벽돌 집이 사람 인(人) 자 형상의 20층 고층 빌딩으로 바뀐 지금에도, 지친 여행자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는 호텔의 정신은 면면하다. 지난 백 년 조선호텔에서 묵은 사람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만 명을 헤아린다.

조선호텔 개관 : 10월10일 건평 580평(약 2000㎡)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최신식 호텔이 경성 한복판에 문을 열었다. 외관은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독일풍으로 붉은색 벽돌을 사용해 지었고, 지붕은 바로크 양식을 따랐다. [사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조선호텔 100년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이었다. 일제는 하필이면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한 성지에 조선호텔을 지었다. 광복 뒤에는 미군정이 호텔을 접수했고, 전쟁 중에는 북한군이 점령한 적도 있었다. 조선호텔은 한동안 정부 소유의 공공기관이었으며, 지금은 대기업이 해외 호텔 체인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조선호텔의 주인만 열거해도 파란만장했던 한국 근현대사가 읽힌다.

조선호텔은 신문물의 창구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승객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곳도,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이 선보인 곳도 조선호텔이었다. 1924년 문을 연 ‘팜 코트(지금의 ‘나인스 게이트 그릴’)’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90년 전 경성 한복판에서 소고기에 브랜디를 붓고 불을 붙여 굽는 플랑베 스테이크와 달팽이 요리를 즐기는 장면은 오늘 돌아봐도 낯선 풍경이다. 팜 코트 양파수프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은 90년이 지난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소중해도 너무 가까이 있으면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제국호텔이 1890년 문을 열었고 현재 세계 최대의 호텔 체인으로 통하는 힐튼이 1919년 시작된 역사를 떠올리면, 2014년 10월10일 개관 100주년을 맞이한 조선호텔은 우리가 자랑해도 되는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비록 붉은 벽돌 한 장 남아있지 않지만, 100년 세월을 거치며 쌓인 추억은 고스란히 전해온다.

“1963년 조선호텔에서 결혼했습니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하기 위해 찾아낸 장소가 조선호텔이었죠. 당시 조선호텔은 국내에서 가장 화려하고 품위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작년에 결혼 50주년을 맞아 여기에서 금혼식을 했습니다. 아내와 아들·딸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조선호텔은 보금자리 같은 곳입니다.”

50년 단골 김진익(76)씨의 일화처럼, 조선호텔은 우리네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50년대 메릴린 먼로의 방한, 60년대 패티 김의 무대, 70년대 나이트클럽 ‘투모로’에서의 밤, 90년대 펍 ‘오킴스’에서의 여유까지 조선호텔은 지난 백 년 세월 동안 우리 곁에서 웃고 울었다. 한국 최고(最古)의 호텔 조선호텔의 100년을 돌아본다.

글=손민호·홍지연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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