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김형욱 사건' 전문가가 조사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가 국정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많은 국민이 궁금해하는 역사적 사건이므로 그 진상을 규명해 밝히겠다는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조사 결과에 따라 자칫 외교 문제로 비화할 소지도 있다.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이 외국에서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 때문에 국가 위신에 손상이 갈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다.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의 중간 조사 결과 발표를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너무 많다. 중요한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절차와 방법도 매우 미숙해 보인다. 결과적으로 진상을 규명하려는 작업이 거꾸로 의혹만 증폭시키고 있어 안타깝다.

첫째, 살인 사건에 가담한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살인 현장에 대한 검증작업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중간 발표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상열 전 주프랑스 공사와 행동대원들에 대한 조사가 필수적이다.

둘째, 낙엽으로 시신을 덮었다는 진술을 그대로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해 보인다. 중앙정보부장까지 지낸 고위 인사를 계획적으로 살해한 범인들이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증거 인멸 목적으로 시신을 처리하면서 땅에 매장하지 않고 낙엽으로만 덮고 현장을 떠났다는 진술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 신현진은 살해 모의 과정과 사후 보고 등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을 보이고 있는데 직접 운전까지 하고 갔다는 사람이 숲의 위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신빙성을 더욱 의심스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셋째,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김형욱을 살해했다고 하는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19일 만에 박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신체제 종식이란 측면에선 오히려 김재규는 김형욱과 입장을 같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공사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어학연수생에 대한 조사만으로 김재규가 살해 지시를 했다고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너무나 성급하다.

넷째, 해외 연수생에게 암살을 지시했다는 점도 석연치 않다. 연수생으로서 파리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이 동유럽인 2명을 포섭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던 김형욱이 낯선 외국인 2명이 타고 온 승용차의 조수석에 순순히 탑승했다는 것과 청부살인자들이 독침을 준비해 온 상태에서 주먹으로 때려 실신시켰다고 하는 진술도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진실위는 객관적으로 믿기 어려운 진술을 그대로 믿으면서 아무런 물증도 찾아 내지 못하고 살해 장소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원래 사전에 계획을 세워 치밀하게 살해한 뒤 시체를 유기하고 증거를 인멸한 살인 사건의 수사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수사 전문가들이 과학적인 수사를 치밀하게 해야 겨우 진상을 밝혀 낼 수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모든 공소 시효가 지난 26년 전의 사건이며, 또 해외에서 일어났다. 이런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려면 수사 전문가들을 대거 참여시킨 전문적인 위원회가 살인 사건의 수사 원칙에 충실하면서 사건 관계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 및 현장 검증작업을 벌여야 한다. 사건 관계인들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 여부도 객관적인 증거 판단 기준에 따라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진실위는 원점으로 돌아가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 그것이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위신을 세우는 일이자 과거사 진상 규명의 본래 취지에도 합당한 자세일 것이다.

김주덕 변호사 전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