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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진실위 중간 발표] 김재규 "그런 놈 놔두면 우린 뭐하는 곳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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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6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김형욱 실종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을 조사해 온 진실위원회(위원장 오충일)가 26일 밝힌 중간조사 결과를 통해서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따라 이상열 프랑스 주재 공사와 중정 요원들이 개입한 조직적인 살해사건이었다는 게 진실위 측의 잠정결론이다.

이번 발표로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의 살해설 등 김씨의 실종을 둘러싸고 난무했던 설은 수그러들게 됐다. 그렇지만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엔 남은 의문점이 적지 않다.

◆ "목표가 김형욱이죠"=김재규 중정부장으로부터 살해 지시를 받은 이상열 공사는 1979년 9월 파리 자신의 집에 5~6명의 후배를 불러모았다. 어학연수 명목으로 체류하던 젊은 중정요원들이다. 중정의 파리 거점장이던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문제"라고 운을 뗀 뒤 현지 북한 통상대표부를 상대로 한 공작임무를 부여한다. 과감성 등을 테스트해 김형욱 살해 임무를 부여하려는 생각에서다.

이 공사는 선발된 신현진.이만수(이상 가명) 두 사람에게 "김형욱이 곧 파리에 온다.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에서 탕진하고 국가기밀을 폭로한다. 이런 사람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며 제거를 지시한다. 또 신현진을 따로 불러내 "일단 임무를 전달받으면 자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김재규 부장님 지시다. 적극적으로 해달라"고 임무를 부여했다. 신씨는 "목표가 김형욱이죠"라고 한 뒤 "보내겠습니다(살해하겠다는 의미). 그 대신 모든 것은 나의 주도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평소 알던 동유럽계 외국인 2명에게 살해를 맡기기로 하고 이 공사에게 대가로 줄 10만 달러와 권총을 요구했다.

10월 7일 오후 김형욱씨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를 받은 이 공사는 신씨를 급히 집으로 불렀다. 이 공사는 "돈이 없다고 거절하려다 오히려 해치우기 좋은 기회다 싶어 돈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다"며 집행을 지시한다. 약속장소에서 이 공사와 신현진.이만수씨 등과 만난 김형욱은 뒷자리의 외국인들과 함께 돈 문제를 논의하러 카페로 가는 줄 알고 이 공사의 푸조 604형 관용차에 올랐다. 이 공사는 "약속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 "집 한 채 있어야겠군"=승용차가 외곽 순환도로로 향할 때 뒷좌석의 동유럽인이 김씨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려 실신케 했다. 일행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파리 교외의 인적이 드문 숲에 도착했다. 김씨를 끌고 간 2명의 동유럽인들은 30분쯤 뒤 돌아왔다. 50m 떨어진 곳에서 김씨의 머리에 7발의 소음권총을 쏘아 죽였고 시체는 묻지 않고 두껍게 쌓인 낙엽으로 덮었다고 했다.

10월 13일께 귀국한 신씨를 맞이한 김재규 부장은 "수고했어. 잘했어.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하는 곳이야"라며 격려했다. 현금 300만원이 든 봉투까지 준 김 부장은 구주과로 발령난 상태이던 신씨에게 "내 직속인 정책연구실에서 일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장가도 가야 하고 집이 하나 있어야겠군. 신혼살림 하려면 40~50평은 돼야지"라며 집을 알아보라고 했다. 진실위는 "신씨는 얼마 뒤 그만뒀지만 이씨는 상당한 고위직까지 지낸 후 퇴직했다"고 밝혔다.

◆ 유골 수습 가능할까=진실위는 지난 2월 김형욱 사건 조사에 착수해 국정원 자료 748건 등을 분석하고 관련자 33명을 면담했다. 그러나 살해계획 수립과 살해과정은 전적으로 신현진씨의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실제로 신씨는 사건 직후 이만수씨가 이탈리아 밀라노로 갔다고 진술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등 보완해야 할 대목이 많다.

이영종 기자

*** 국정원 진실위원회 명단

◆ 민간 위원(10명)=오충일 목사(위원장), 안병욱 가톨릭대교수, 손호철 서강대교수, 이창호 경상대교수, 한홍구 성공회대교수, 문장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장, 곽한왕 천주교 인권위 운영위원, 임종률(법명 효림) 실천승가회의장, 김갑배 전 법제 이사, 박용일 변호사

◆ 국정원 측 위원(5명)=김만복 기조실장 등(나머지 4명은 비공개)

*** 바로잡습니다

5월 27일자 5면 국정원 진실위원회 명단 가운데 김갑배 대한변협 법제 이사는 전 법제 이사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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