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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대륙 아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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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1세기의 역사학자들에게 2005년 5월 29일은 세기 초의 상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날은 역사의 의미를 일깨우고 그 진행을 가속화하는 날이다.

이날 프랑스인들이 국민투표에서 유럽헌법을 부결하면 그들은 본의 아니게, 또 자신들도 모른 채 21세기를 '아시아의 세기'로 규정짓게 된다. 반대 여론이 높게 나오는 여론조사를 볼 때 프랑스인들이 실제 투표에서도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있다. 유럽헌법의 부결은 유럽연합에 새로운 출발을 열어주는 게 아니라 완전한 마비 또는 혼돈을 가져올 것이다.

미국이 지배한 한 세기 조금 넘는 기간을 지나 이제 세계의 무게중심은 서에서 동으로 움직일 것이다. 유럽의 종말이 새로운 동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지역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혼재된 프랑스인들은 전통적 유럽대륙의 모든 문제를 내비치고 있다. 폴란드 등 유럽연합의 새 회원국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느낄 수 있는 열의와 활기를 갖고 있다. 이런 활기는 성공에 대한 욕구, 결과에 대한 목마름이다. 현상유지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재창조될 수 없는 과거에 매달리는 시대착오적인 '또 다른 유럽'을 향한 자멸적이고 비현실적인 추구가 아니다.

아시아에서 역사의 진행에 가속도가 붙고 있는 이 시점에 프랑스가 유럽헌법을 부결하는 투표를 한다면 이는 유럽연합 '탈퇴' 행보를 구체화하는 것이 된다. 마치 '역사'라는 기차가 '역'에 유럽연합을 두고 떠나는 것과 같다.

물론 유럽의 종말이 반드시 동양의 승리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시아의 세기'란 역사적 필연성은 아니다. 아시아 대륙은 경제성장과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부적 충돌에 직면해 있다. 분열되고 호전적이었던 유럽의 과거를 상기시킨다. 만약 유럽이 활력이 없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면 이는 평화에 푹 빠져 있는 대륙이라는 뜻이다. 프랑스.독일과 같은 과거 적들 간의 화해는 진심이다. 이를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아시아는 이런 과정 자체가 결여돼 있다. 유럽 국가들 간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재 희박하다. 반면 아시아에서의 전쟁 가능성은 높다.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의 긴장이 약화되자 중국과 대만 간의 고조되는 긴장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일본과 중국, 일본과 한국 간의 긴장도 증폭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장기적인 정치적 안정과 이에 수반한 경제성장도 확실치 않다. 베이징(北京)에서 나오는 새로운 종류의 긴장감은 중국의 새 지도자들의 불안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중국의 안정은 번영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사회 내의 불평등은 중국사회의 긴장 고조와 정부 지도력의 신뢰성 하락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아시아의 문제점을 고려하더라도 오늘날 세계의 미래는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있다고 느껴진다. 인구통계학적인 객관적 이유에서도, 또 그들의 에너지라는 주관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설령 프랑스인들이 유럽헌법을 가결하더라도 유럽이 젊음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래는 승리를 가장 강력하게 원하는 자의 것이다. 현상유지에 급급하거나 비현실적인 꿈을 꾸며 스스로 자멸하려는 자에게는 가지 않는다. 아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위험과 기회, 성장하는 경제와 고조되는 긴장, 거대한 에너지와 통제되지 않는 열정의 대륙이다. 이 점에서 아시아는 반(反)유럽의 위치에 있다. 문명과 권력의 자랑스러운 중심이었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결심이 확고한 대륙이다. 유럽이 아시아에 감히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제안은 이렇다. 화해하려는 노력과 민주적인 정권들의 도움으로 민족주의를 통제하고 초월하라.

도미니크 모이시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 고문
정리=박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