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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시인 설정식씨 자녀들, 헝가리 작가와 특별한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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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 왼쪽부터 설정식 시인의 딸 정혜씨, 차남 희순씨, 막내아들 희관씨, 티보 머라이 부부와 딸. 희관씨가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이다.

52년 만에 이뤄진 대(代)를 넘긴 만남.

월북 시인 설정식(1912~53)씨 자녀들이 22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한국전쟁 당시 선친과 돈독한 친분을 쌓았던 헝가리 작가 티보 머라이(81)를 만났다. 별 것 아닌 만남일 수도 있지만 52년간 이 헝가리 작가와 설씨 가족간에 이어진 사연은 참으로 길고 인연은 기구하다.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21일 내한한 머라이는 한국전쟁 당시 헝가리의 한 일간지 기자 신분으로 북에서 종군기자로 일했다. 1952년 그는 휴전 협상을 취재하러 개성에 들렀다 북측 통역관으로 나온 설 시인을 만났고, 둘은 이내 친해졌다. 설 시인은 일제시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지식인. 해방 직후 미군정에서 일했지만 남한 정부의 부패에 염증을 느껴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월북했다. 출중한 영어 실력으로 종군기자 통역을 맡았고, 헝가리에서 온 머라이를 만났다.

휴전 협상이 1년이 넘도록 진행되면서 둘의 친분 또한 두터워졌다. 머라이는 52년 12월 헝가리에서 설씨의 장편시집 '우정의 서사시'를 출간하기도 했다. 설씨의 작품은 전쟁 와중 자신이 심장 발작으로 쓰러져 헝가리가 북녘 땅에 세운 야전병원에서 머물렀던 세월을 시로 읊은 것이다.

그러나 둘의 인연은 비극으로 끝맺는다. 전쟁 직후 머라이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정부 반역자 재판 장면 취재를 의뢰받는다. 그리고 재판장에서 그는 자신이 한국 땅에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가 사형을 언도받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재판 과정을 기사로 쓰지 않고 막바로 헝가리로 귀국한다.

그리고 올해 그는 서울국제문화포럼의 초청을 받았다. 마침 포럼의 조직위원장을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김 교수의 아내 설순봉씨가 또 마침 설시인의 조카딸이다. 그렇게 52년간 끊어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만남의 자리엔 설 시인의 딸 정혜(64), 둘째 아들 희순(63), 막내아들 희관(58)씨와 김우창 교수 내외가 함께 했다. 미국에 사는 장남 희한(68)씨는 참석하지 못했다. 희관씨는 자신의 홈페이지(www.freechal.com/hksol)에 선친이 오래전 헝가리 친구인 머라이와 만난 사진을 공개했다. 희관씨는 홈페이지에 "우리 가족은 그의 얼굴과 눈동자 속에서 선친의 영혼을 찾아냈다"며 "얼굴도 본 적 없는 선친 대신에 그 분의 헝가리 친구를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28일 저녁 다시 한번 만나기로 약속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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