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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범과 이름 같아 억울하게 끌려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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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 15년간 다리를 절었다. 수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병원에 가는 것 말고는 문밖 출입을 전혀 하지 못했다. 잘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슬람 무장단체에 가입해 테러 활동을 할 수 있었겠느냐. 너무 억울하다."

쿠바 관타나모 기지 수용소에 수감된 테러 용의자 상당수가 이같이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다고 AP 통신이 23일 보도했다. 이곳에는 현재 40개국 540명이 갇혀 있다. AP 통신은 지난해 11월 정보공개법에 의거, 수감자들의 진술.증언.관련 서류 등을 공개하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미국 정부는 올 1월까지 재판을 마친 100여 건에 대한 2000여 쪽 분량의 서류를 20일 AP 통신에 넘겼다.

수감자들 중에는 "탈레반 전사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음식도 주고 의료시설도 있으니 이곳이 '천국'이 아니냐"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수감자 다수는 심신허약자나 양계업자, 유목민 등 '보통 사람'이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의 주인공처럼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탈레반 고위 간부로 활동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 양계업자는 "지난 3년간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얘기했지만 곧이 들어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군은 그가 AK-47 자동소총과 공기총 등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기소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마을에서는 보호용 무기를 지니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 농부 형제는 잃어버린 염소를 찾으러 다니다 미군에 체포됐다. 미군은 이들이 체포된 곳 근처에서 폭발물이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AP 통신은 "아프가니스탄은 광산 개발이 활발해 폭발물이 도처에 널려 있다"고 밝혔다. 신원 착오로 끌려온 사람도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아프간 거처에서 발견된 문건에 이름이 올라 있다는 이유로 감금된 사우디아라비아인은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내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수백만 명은 있다. 관타나모 안에도 두 명이나 있다"고 항변했다.

수감자들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증거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국가 안보상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기자라고 밝힌 한 죄수는 "내가 테러 분자라는 증거가 있다면 공개하라. 증거도 없이 가두는 것은 불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군이 지명한 사람 외에는 변호사를 쓸 수 없는 것도 이들의 큰 불만이다.

◆ 관타나모 수용소는=관타나모 기지는 쿠바 동부에 위치한 미군기지. 원래 스페인 영토였으나 미국.스페인 전쟁을 계기로 1903년 이후 미 해군이 영구 조차(租借)해 기지로 쓰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9.11테러 두 달 뒤인 2001년 11월 이 기지에 테러범 수용소를 설치했다. 미국 영토 밖에 있어 미국의 사법적 감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군은 이 기지에 아프가니스탄.시리아.요르단 등 전 세계 40개국에서 체포된 540여 명의 테러 용의자를 수감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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