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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싱크탱크 파고드는 일 극우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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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일본 국가기본문제연구소의 시마다 요이치(島田洋一) 이사 등 3명은 이달 초 민디 커틀러 아시아폴리시포인트 소장, 래리 닉시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데니스 핼핀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객원연구원 등을 차례로 만났다. 그 자리에서 『위안부 이슈』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읽어보라”며 건넸다. 그 책은 위안부를 “본인들의 의사는 아니었지만 병사들에게 성을 팔아야 했던 위치에 있던 여성”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게 아니라면서도 ‘성을 판다(sell sex)’로 표현함으로써 교묘하게 매춘으로 매도한 것이다. 또 위안부로 충원된 이유를 “정부기관의 강제성이 아니라 가난과 민간업자의 개입”이라고 주장해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고 당사자 책임으로 돌렸다.

 이처럼 일본의 극우 민간기관이 워싱턴 싱크탱크에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으로 매도하는 홍보 책자를 뿌린 사실이 드러났다.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일본 극우 인사들의 행태가 워싱턴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홍보로 진화한 것이다.

 핼핀 연구원은 기자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 “성을 판다는 표현은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적 매춘이라는 함의를 준다”며 “위안부를 ‘성노예(sex slave)’로 규정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인식을 바꿔보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했다”며 “만약 클린턴 전 장관이 대통령이 되면 미국 대통령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요구하려는가”라고 반문했다.

 소책자는 사망한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강제 연행 증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 만큼 이를 근거로 한 1996년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유엔 여성폭력문제특별보고관의 위안부 보고서는 “허구의 가정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엔 “13세 때 물을 길러 갔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끌려갔다” “일본 군수공장으로 일하러 가는 줄 알고 갔다”는 위안부들의 증언 등 다른 증거가 촘촘히 명시돼 있다. 게다가 소책자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앞두고 일본 정부가 청취했던 위안부 증언조차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거부했다.

 일본 극우 진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를 인권 침해로 접근하는 워싱턴 풍토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 워싱턴 정가의 대다수 견해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일본 극우파들의 행태가 가소로울 뿐이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