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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이본좌' 의 생존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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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인식
강인식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

지상파 예능에서 ‘괴짜특집’이란 타이틀을 걸고 루시드폴·이적·장기하를 초청해 토크쇼를 진행했다. 서울대를 나온 엘리트지만 꿈을 찾아 비주류 음악으로 모험을 떠난 괴짜들의 이야기. 프로그램은 꿈의 간절함을 전하려 했으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연예뉴스는 방송을 ‘엄친아 토크쇼’로 해석했다.

 얼마 후 또 다른 방송에는 히트곡 제조기 ‘용감한 형제(강동철)’가 초청됐다. 잘나가는 아이돌치고 그의 노래를 받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그는 대중음악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MC가 물었다. “뮤지션들 보면 학벌 좋은 분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 보면 주눅들거나 그러진 않으세요?” ‘용감한 형제’는 대학물을 먹지 못했다. 고교 시절엔 조폭이 꿈이었을 정도로 문제아였다.

 비슷한 시기에 방송된 두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사고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대중(mass)의 취향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으면서도 ‘서울대’와 같은 결정적 요소도 갖추지 못한 비주류 뮤지션은 어떻게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을까. 생뚱맞게 이런 고민을 한 건 인디 가수 이장혁(42) 때문이다. 2004년 나온 이장혁 1집은 인디신의 놀라운 성취로 여겨진다. 평론가·뮤지션들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앨범에 꼽히기도 했다. 팬들은 그를 ‘홍대 앞 이본좌’라 부르기 시작했지만 대중적으로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앨범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는 갔지만, 그는 방송을 멀리하고 인디신만 고집했다.

 고졸의 그가 음악을 시작한 건 1996년이었다. 8년이 지나 솔로 1집이 발표됐고, 그로부터 4년 후인 2008년 2집이 나왔다. 그리고 이달(2014년 9월) 3집이 발매됐다. 6년 만에 신보가 나오자 언론은 그를 ‘과작(寡作)의 뮤지션’이라고 칭했다. 여섯 살 아들의 아빠이기도 한 그는 ‘돈이 안 되는 음악’만으론 살 수 없는 생활인이다. 그래서 10년 가까이 지역 언론사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는 광고음악을 만드는 회사에서 작곡을 맡았다. 일을 겸하느라 앨범이 늦어진다면, 돈이 되는 음악을 하면 되는 게 아닌가? “대형 기획사와 방송,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내 음악이 분명 변할 거예요.”

 하지만 그는 ‘배고픈 뮤지션’으로 자신을(또한 인디 가수를) 규정하는 건 왜곡이라고 말한다. “그냥 두 가지 일을 하는 거죠. 음악과 또 다른 일. 내가 만든 음악은 대중적이지 않더라고요. 만들어 보니 그래요. 음악은 본질적인 내 꿈이기 때문에 그걸 변형시키고 싶진 않아요. 계속하고 싶어요. 음악도 가족도 잃지 않기 위해 제가 선택한 게 투잡이에요. 그게 다입니다. 과작이라고 하는데, 죽을 때까지 하면 더 많이 (곡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홍대 앞 어느 라이브카페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인디에 들어온 애들이 음악을 그만두는 건 배고파서가 아니에요. 역량의 한계 탓이죠. 더 이상 곡을 쓸 수 없어서 사라지는 거예요. 어디든 마찬가지 아닌가요. 인생 깁니다.”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