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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작곡가 눈으로 쓴 ‘고전음악 공포증’ 치료 처방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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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24면

에런 코플런드. 그는 말년에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했지만 90세까지 살았다. [미 국회도서관]

갖가지 콤플렉스가 있지만, ‘고전음악 콤플렉스’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치열하게 사느라 고전음악과 친할 기회가 없었다.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지금 클래식 음악을 즐기려고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공고전음악증(恐古典音樂症)’탈출에 효험이 검증된 책은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에게 추천할 책이 있다. 『음악에서 무엇을 들을 것인가(What to Listen for in Music)』(1939·이하 『무엇을』)가 바로 그것이다.

<38> 에런 코플런드 『음악에서 무엇을 들을 것인가』

저자 에런 코플런드(1900~1990)는 20세기 미국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무엇을』은 에드워드 핼릿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1961)와 마찬가지로 강연록을 바탕으로 집필됐다. 1936~37년 뉴욕에 있는 명문 더 뉴스쿨(The New School)에서 행한 강의가 배경이다. 아쉽게도 아직 한글판이 없다. 한 출판사에서 현재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음악에서 무엇을 들을 것인가』의 영문판 표지.

미국 최초로 미국다운 음악 작곡
코플런드는 뉴욕 브룩클린의 러시아 출신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브룩클린은 알 카포네, 루돌프 줄리아니, 에디 머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우디 앨런 등 세계적인 명사(名士)들의 고향이다. 코플런드는 미국 최초로 미국다운 음악, ‘민족적’ 음악을 작곡했기에 ‘미국 음악의 목소리’로 평가된다. 지금이야 미국적인 게 곧바로 글로벌적인 경우가 많지만, 20세기 초 미국은 유럽과 차별화되는 나름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하는 나라였다. 코플런드는 퓰리처상(1944)·오스카상(1950)·대통령자유메달(1964)을 받았고 하버드대 석좌교수(1951~52)를 지냈다. 명예박사학위를 33개나 받았다. 겸손한 성격이라 누구하고도 잘 지냈다. 꽉 찬 인생을 살았다.

‘음악에 대해 몰라도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의견도 있다. 『무엇을』의 견해는 다르다. 음악을 깊게 음미하기 위해서는 음악 지식을 바탕으로 한, 듣기 스킬(skill)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들을 수도 있지만, 보다 의식적인 음악 듣기도 필요하다 주장이다. 풍요로운 언어 생활과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서는 읽기·듣기·말하기·쓰기 스킬이 받쳐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코플런드는 부(富)를 과시하기 위해 음악당에 가는 것은 ‘좀 아니다’고 봤다. 그의 지론은 사회·경제적 신분이나 학벌 같은 배경과 무관하게 음악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기초는 필요하다. 19개 장(章)으로 구성된 『무엇을』은 곁가지는 잘라내고 꼭 필요한 음악 감상의 ABC를 담았다. 초급에서 중급자용이다. 하지만 모든 고전이 그렇듯이 음악학도나 전문가들도 건질 게 많은 책이다.

요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협업)이라는 말이 부쩍 유행이다. 코플런드에 따르면 음악은 작곡가·연주자·청중이라는 삼위일체의 협업을 요구한다. 협업이 잘되려면 당사자들이 서로 요구를 잘 들어줘야 한다. 작곡가는 연주자와 청중에게, 청중은 작곡가·연주자에게, 연주자는 작곡가·청중에게 뭔가 요구하는 게 있을 것이다.

『무엇을』은 코플런드가 작곡가로서 청중에게 요구하는 것을 정리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전문가보다는 아마추어 청중이 내 안의 작곡가를 자극한다”고 말한 그는 작곡가들과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불편했다. 그 간격을 메우는 『무엇을』은 생기(生氣)를 요구한다. 코플런드는 말한다. “음악을 듣는 사람이 생기가 있어야 음악도 생기가 있다.”

청중의 생기는 어디서 나오는가. 체험이 제일 중요하다. 남이 대신 들어 줄 수는 없다. 그는 독자들에게 ‘과거보다 음악을 훨씬 많이 듣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요구한다. 음악 이론서 수십 권을 읽는 것보다 피아노로 치는 음(音) 딱 한 개를 듣는 게 더 낫다는 게 코플런드의 생각이다.

어떻게 들을 것인가. ‘진정으로’ 들어야 한다. 미국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은 “청중의 문제는, 음악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듣지(hear)’만 음악을 진정으로 ‘듣지(listen)’는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진정으로’ 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책의 제목에 실마리가 나와있다. ‘listen for’는 ‘뭔가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다’는 뜻이다. 무엇을 ‘listen for’할 것인가. 『무엇을』에 나오는 음악의 핵심 요소들인 멜로디·리듬·화성·음색이나 주요 음악 형식에 대해 배운 다음, 이것들이 실제 작품에서 어떻게 등장하고 구현되는지 살펴야 한다.

‘멜로디→리듬→화성→음색’ 순으로 수준 높여야
코플런드식 음악 듣기는 입체적이다. 코플런드에 따르면 음악 듣기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감각적인 차원(sensuous plane)이 있다. 가장 기초적인 차원이다. 가장 많은 수의 청중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기분 좋은 감정과 느낌이 생겨나는 가운데 그저 무작정 듣고 즐기는 것이다. 뇌를 전혀 쓸 필요가 없다. 음악을 식사나 독서의 배경으로 활용하는 차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첫째 차원을 ‘악용’한다고 코플런드는 지적했다. 음악을 위로나 탈출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 표현적 차원(expressive plane)이 있다. 모든 음악은 후회건, 승리감이건, 분노건, 기쁨이건 뭔가를 표현한다. 작곡가의 뜻이 담겼다. 작곡가의 뜻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수록, 들을 때마다 읽혀지는 ‘스토리’가 새로울수록 그 작곡가는 더 위대한 작곡가다. 셋째, ‘음악 그 자체’의 차원(sheerly musical plane)이 있다. 최고급 차원이다. 음(音·note)이 어떻게 조작(manipulation)되는지를 따져보는 차원이다. 초급자에겐 우선 멜로디가 들린다. 그 다음에는 리듬이 포착된다. 화성과 음색까지 들려야 최고급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고급 음악 애호가는 이 3차원을 넘나든다. 한데 최고급 차원에 다다른 전문가급 애호가는 ‘수렁’에 빠질 수 있다. 지나치게 따지다 보면, 정작 음악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의 여러 요소들이 어떻게 조직되는지 알게 된 음악 애호가들은 어떻게 될까. 음악 감상을 넘어 음악을 평가하게 된다. 감상은 결국 평가로 귀결된다. 예컨대 이런 평가 기준이 있다. “멜로디는 완성과 불가피성의 느낌을 제공해야 한다.” 전체적인 완성도에 기여하지 못하는 군더더기 멜로디는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클래식 음악도 그렇지만 현대 음악은 더더욱 접근이 어렵다. 현대음악의 경우에도 반복적·규칙적 듣기가 이해의 핵심이라고 코플런드는 강조한다. 고전음악이건 현대음악이건 음악의 모든 현현(顯現)과 친숙해지는 사람이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작곡가는 어떤 사람인가. 코플런드에 따르면 “작곡가는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내준다”. 그는 또 작곡가들에게 작곡이란 식사하고 취침하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활동이라고 했다.

코플런드는 대중 음악과 소수 전문가 청중을 위한 음악을 모두 작곡했다. 50대에는 주로 지휘를 했다. 작곡보다 지휘가 돈벌이가 더 잘 됐다. 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식인을 대하는 게 불편한 경우도 있었다.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1887~1979)에게 작곡을 배웠는데 유학시절부터 ‘불필요한 적은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코플런드는 1930년대에 진보적인 단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용공(容共·communist sympathizer)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평생 독신이었다. 90회 생일이 지나고 2주만에 세상을 떴다.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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