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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2. 개화파의 列强 인식-<1> 미국 (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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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백여년 전 개화기 조선의 역사가 오늘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주변 열강과의 역학관계를 잘 조정해 살아가야 하는 한반도 주변의 국제 정세가 반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화기 지식인들이 당시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4회에 걸쳐 살펴볼 예정입니다. 첫째 순서로 미국에 대한 인식입니다.

박노자 교수는 '한성순보''독립신문' 등에서 보이는 매우 호의적인 미국관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당시 압축적 근대화의 모델로만 미국을 상정했던 개화파들의 인식의 한계를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허동현 교수는 개화파 지식인들이 미국에 대해 짝사랑만 퍼부은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도, 미국을 선악의 판단 대상이 아니라 용미(用美)적 관점에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구체적 정책 대안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점을 아쉬워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개화기에 쓰인 미국 관련 글들을 읽어보면, 오늘의 미국이 아닌 완전히 다른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이광수(李光洙.1892~1950)의 작품 '무정'(無情.1917)의 결말을 기억하시지요?

소설의 주인공인 신지식인 한 쌍이 과학문명을 통해 암담한 조선의 현실을 개선하겠다는 일념으로 미국 시카고대로 유학 가서 졸업합니다. 당시 이광수에게, 과학과 문명의 화신인 미국은 조선을 구할 수 있는 구세주이자 시혜자였던 겁니다.

이와 같은 긍정 일변도의 미국관은 개화기 초반부터 형성됐습니다. 1880년 '조선책략'을 통해 청나라 양무(洋務)개혁 지도부의 호의적인 대미 의식이 조선에 이식된 뒤 개화기 간행물들은 미국을 요순시대에 버금가는 새로운 유토피아로 묘사했습니다.

예컨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는 선거라는 제도 덕분에 오직 덕망이 높고 재간이 풍부한 사람만이 대통령이 된다고 하면서, 미국의 선거를 임금을 뽑기 위한 과거시험처럼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했습니다(1884년 8월 31일자). 그 아름다운 제도 덕분에 날로 부강해지는 미국의 번성함을 아무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 '한성순보'가 갖고 있던 미국관의 핵심이었습니다.

그 뒤 '독립신문'은 한술 더 떠 미국을 문명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약자를 보호해 주는 수호천사로까지 서술했습니다. 서재필과 그 동료에 의하면 미국은 "강토를 넓힐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무례하게 압제를 받으면 자기 나라 군사의 목숨을 내놓고라도 약자를 구제해 주는"(1899년 2월 27일자 논설) 공평함의 화신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신뢰를 받았던 '황성신문'의 개신 유림들 역시 일본에서 출간된 '미국독립사'를 번역.출판(1899년), 미국의 공평함과 신의를 극구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2~13시간의 일과와 쥐꼬리만한 월급에 저항해 파업을 일으킨 이민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유색 인종의 이민을 최대한 제한하며, 중남미에서 무장 간섭을 일삼았던 당시의 미국을 어찌해서 한국의 개화적 유림들은 요순의 나라로 봤을까요?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압축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불과 1백여 년 사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세계 제2의 무역대국으로 발전한 미국의 성장 속도는 고무적인 모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개화파들은 국민선거라는 메커니즘이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정치.사회적 안정성을 가져다주었다고 보았습니다.

의병이나 동학도들을 비도(匪徒)라고 낮추어 불렀던 개화파 신사들이 정치에서 소외당하고 경제적으로 희생만 강요당한 미국 하층민들의 고통과 저항에 대해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우선 생각하는 미국은 시카고대와 같은 엘리트 교육 기관들이 즐비한 지적인 천당이었습니다. 즉 개화파의 개발주의.엘리트주의가 그들이 친미화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둘째, 개화파는 당시 미국이 다른 열강에 비해 극동 지역에서 영토적 야심이나 침략적 경향이 비교적 약했던 사실을 확대 해석해 미국을 공평한 나라로 보았습니다.

미국이 중남미에서 행한 침략의 역사에 대해 개화파들은 자세히 알지도 못했으며, 어차피 조선과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의 세계 정보와 인식의 한계도 확연히 보입니다.

셋째, 경제 수탈과 이권 침탈만을 일삼던 다른 여러 열강과 달리 미국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 건립을 통해 조선에 문명의 혜택을 부여했다는 점을 높이 산 것 같습니다.

이처럼 매우 호의적이었던 1백년 전의 대미 의식을 돌아보면, 국제정치에 대한 동시대인의 판단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느낍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미국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은 선조들에 비해 더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지난 세기의 역사적 경험 덕분입니다.

<사진 설명 전문>
뉴욕에서 발행된 주간지 ‘뉴스 페이퍼’(1883년 9월 29일자)에 실린 그림. 한·미 수호조약(1882년 5월 22일)을 체결한 1년 후인 1883년 7월 8일 최초의 도미 사절단으로 민영익 일행이 미국을 방문해 아서(Arthur) 미국 대통령을 접견하고 있다. 당시 사절단은 조선의 국왕에게 하는 것과 같은 예의를 표하고 있으나, 왕조시대가 아닌 미국의 대통령이 이 같은 예법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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