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정권 아닌 민족의 눈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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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5월 9일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격스러운 자존심 같은 것을 느낀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60년 전 1945년 5월의 우리 형편은 어떠했는가. 35년 동안 일제 식민지로서 참혹하게 쪼들린 나머지 그들이 저질러 놓은 전쟁에 강제로 끌려간 징병 노무자, 위안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전 민족이 기진맥진 스스로의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열강의 전쟁 종결과 그 결과 처리에 운명을 맡겨버린 말할 수 없이 초라한 형편이었다. 그로부터 꼭 60년이 지난 2005년, 대한민국 대통령이 연합국의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승전 기념 행사에 참석한 당당한 모습은 우리 가슴에 조국에 대한 긍지를 새롭게 굳혀주는 계기였다.

6월 말에는 한.미, 한.일 정상회담이 연이어 개최될 것으로 예고돼 있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심상치 않은 기류와 위기설을 감안할 때 6월 정상회담에 쏠린 국민의 관심과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이번 정상회담은 그 모양보다도 실질적 내용과 결과가 더 중요할 것임은 자명하다. 결과 여하에 따라서는 한반도의 위기를 타개하는 돌파구를 열고 한걸음 나아가 동북아의 안정된 세력 균형을 조성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다. 이렇듯 중요한 고비에서 우리의 입장과 자세를 냉철하게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의 입장이 분명하게 정리되지 못하면 불필요한 오해와 혼선이 국내외에서 벌어지게 된다.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처한다든가, 대화의 상대에 따라 적당히 입장을 조정하는 것은 전술적 또는 외교 기술적 차원에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적 기교는 일관성 있는 원칙과 전략의 부재, 혼선을 메워주거나 엄폐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선 우리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 우리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확실하고 분명한 상호 간의 대화가 필수적 과제다.

둘째,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를 각오가 있는지를 새삼 정리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미국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예방하는 데 국가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부여해 왔다. 그러기에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핵 폐기를 유도하기 위해 최대한의 양보를 기대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이 배제된 채 북.미 양자 간 협상도 수용하겠다는 입장이다. 만약 이러한 우리의 입장에 미국이 동조하지 못한다면 한.미 동맹의 성격은 재고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북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어떠한가. 우리는 민족공동체 건설을 향한 남북 공존의 원칙을 존중하고 북한 체제 존립에 대한 위협을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그대로 좌시할 수 없다. 만약 북한의 안보에 대한 국제사회의 보장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보유를 고집한다면, 그리고 이를 위해 전쟁 불사로 위협한다면 우리는 전쟁을 각오하고라도 이를 제어할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우리와 함께 민족 앞에 약속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7000만 한민족의 안전을 가장 확실히 담보한다는 것이 우리의 흔들림 없는 입장이다.

셋째, 한.미 동맹 관계의 극단적 수정이나 남북 간의 전쟁이란 엄청난 대가를 각오하며 우리의 입장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절대 우선돼야 한다. 결국 대가를 치르는 주체는 정부나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와 동의가 없는 정책은 원천적으로 부당하고 무력한 것이다. 그러기에 비록 정상회담까지의 남은 시간은 촉박하지만 국민의 뜻과 바람과 지혜를 모으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남쪽이건 북쪽이건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는 민족의 안보이지 정권의 안보가 아님을 명심할 때 민족 생존의 돌파구는 열릴 것이다. 국가 지도자는 그 어떤 시점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것이 예외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민족은 영원히 지속돼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간단한 원리를 남북의 지도자가 되새겨야 할 때가 바로 오늘인 것 같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