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물가에 너무 집착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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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16일 ‘국회 경제 정책포럼‘’에서 “당초 물가 안정 목표치를 2.5~3.5%로 판단했지만 구조적인 측면을 간과해 오류가 있었다”고 밝혔다. [뉴스1]

“나무를 봤지 숲을 보지 못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식당에서 16일 오전 열린 ‘국회 경제정책포럼’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연사로 초청받았다. 이 총재는 영국 경제학계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바친 사죄문 한 토막을 소개하며 말문을 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1년 뒤인 2008년 11월 여왕은 런던정경대(LSE) 학회에 참석했다. 학회에 모인 영국을 대표하는 석학 모두를 진땀 빼게 할 질문을 여왕이 던졌다. “이렇게 훌륭한 학자가 많으신데 왜 아무도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죠.”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영국 경제학자는 물론 영국은행(BOE), 재무부, 민간 금융사 대표급 전문가가 총출동해 6개월 넘게 연구를 했다. 결과는 여왕에게 보내는 세 쪽 분량의 사죄 편지에 담겼다. 이 총재는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어떤 형태와 강도로 나타날지 몰랐다”는 반성문 내용을 전하며 개별 금융회사를 나무에, 전체 금융시스템을 숲에 비유했다.

 하지만 이 비유는 한은에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포럼에 참석한 의원들은 “한은이 물가에만 너무 치중하는 게 아니냐” “물가 목표를 내릴 의향이 없느냐”며 질타 섞인 질문을 던졌다. ‘나무(물가)만 봤지 숲(경제 전체)을 보지 못했다’는 지적이었다. 이 총재도 이를 인정했다. “물가 전망에 오류가 있었다는 점, 저희가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했다. 그는 “구조적 요인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2년 전에 정한 (소비자물가 상승률) 2.5~3.5% 목표치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적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지적을 심각하게 고민하겠다”고 약속했다.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본 나무(물가 전망)마저도 애초에 잘못 심어졌다는 반성까지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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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은 통화정책의 최대 목표는 물가 안정이다. 한은법에도 새겨진 내용이다. 한은은 2013년부터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2.5~3.5%(전년비 기준)로 안정시킨다는 목표 아래 통화정책을 운용했다. 바로 물가안정목표제다. 대부분 중앙은행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은은 1년 넘게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올 들어 1%대 물가가 계속되고 있다. 낮은 물가에 경기 침체까지 겹치는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나온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물가 안정=경제 안정’이란 공식이 통하지 않게 됐다. 이 총재 역시 “금융위기의 교훈이라고 한다면 물가 안정을 하면 거시경제가 안정된다는 인식이 깨졌다”고 말했다.

 선진국 중앙은행은 물가안정목표제를 이미 ‘낡은 칼’로 치부한다. 그를 보완할 신무기를 장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은 완전 고용, 스위스는 통화가치 안정을 목표에 추가했다. 영국은 명목 국내총생산(GDP)처럼 경제성장을 대표하는 지표를 통화정책 목표에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한은과 정부 역시 2011년 한은법 개정 때 통화정책 목표에 ‘금융 안정’을 추가했다. 그러나 그를 뒷받침할 행동이 부족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는 중이다. 한은 관계자는 “한은이 2011년 이후 금융 안정이란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그 목표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라며 “거시금융 안정정책에 사각지대가 있다”고 짚었다.

 이 총재는 이날 나름의 대안도 제시했다. 한은 총재는 물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 등 경제정책 수장이 모두 참여하는 금융안정협의회 신설이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교훈은 미시 감독정책만으로는 경제 안정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라며 “시스템 전체로 봐야 하고 유기적 협조가 필요하므로 거시 건전성과 재정정책 등을 다루는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조현숙 기자

◆물가안정목표제(Inflation Targeting)=일정 폭의 물가상승률을 목표로 정해놓고 그 범위 안에서 실제 물가가 움직이도록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물가가 목표 범위를 벗어나면 기준금리를 올리거나 내려 조절을 꾀한다. 1990년 뉴질랜드 연방준비은행에서 시작해 주요국 중앙은행에서 차례로 채택했다. 외환위기로 물가 급등에 시달렸던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98년 물가안정목표제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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