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제57화 패션50년|제1회 패션 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1957년 10월 나는 오랫동안 별러오던 첫번째 패션쇼를 반도호텔 다이내스티룸에서 열었다.
30년 가까운 양장계 생활을 통해 국내에서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수백회의 패션쇼를 가졌지만 제1회때 만큼 기억에 남고 감회 깊은 쇼는 다시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발표회라는데 서만 오는 감상은 아니다. 우선 패션쇼의 준비과정에서부터 친지들의 격려나 도움이 너무나 컸다.
의상발표회를 가져야겠다는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미처 엄두를 못내는 필자에게 『최선생도 쇼 한번 하시라』 고 조르다시피 권하던 「국제양장회」의 단골 고객들을 비롯해서 평소
친분이 있던 여류문인들의 적극적인 권유 등 주변의 격려가 없었다면 나의 첫번 패션쇼는 좀더 늦춰졌을는지도 모른다.
필자 개인의 행사를 마치 한집안 일이나 스스로의 일 처럼 나서서 도와주신 당대의 유명 인사들 중엔 지금은 유명을 달리 했거나 속세를 떠난 분도 있어 이 글을 쓰는 마음에 새삼
복잡한 감회가 인다.
패션쇼의 후원은 여원사(당시 사장 김명엽씨)가 해주었는데 광고나 포스터등 어려운 일들을 전적으로 맡아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쇼의 사회자는 당시 인기작가였던 고 김말봉 여사로서 재치 있고 해학적인 말솜씨로 발표회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었다.
필자의 인사말이 끝나자 여류문인회를 대표해서 한무숙여사가 전해준 꽃다발은 지금도 그 향기가 코끝에 감도는 듯 당시의 감격이 날이 갈수록 마음에 새롭다.
한국 최초로 여원의 모드란을 맡았을 때 못쟎게 고심하고 내 온 능력을 다 기울여 마련한 50여점의 작품은 여대생이나 직장여성을 위한 평상복 및 정장과 이브닝드레스등 파티복이
주류를 이뤘었는데 참관자들은 대체적으로 좋은 반응을 보여주셨던 걸로 기억된다.
모델로는 무용가 김백초여사(작고), 인기배우 윤인자(승적귀의), 안나영(작고), 김미정양 등이 수고를 해주었다.
요즘처럼 특수교육을 받은 직업모델이 아니었으므로 다소 서투른 점은 없지 않았지만 무대나 영화에서 닦은 연기력과 빼어난 미모로 의상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었고 무엇보다 패
션쇼의 모델을 선다는 자체에 기쁨과 자부심을 느껴서 열심인 점이 디자이너의 입장으로서는 더없이 다행스러웠다.
이렇듯 주변 여러분의 뜨거운 협조로 나의 첫번 패션쇼는 대과 없이 끝내게 되었다.
각 신문에서도 호평과 함께 쇼에서 발표된 의상사진을 여러장 싣는 등 발표회 기사를 대대적으로 취급해주었다.
당시에는 패션 쇼가 당당한 하나의 문화행사로서 일간신문의 귀한 지면을 한 페이지씩 차지하는 등 상당한 대접을 받았었다.
웬만한 패션쇼는 문화면의 단신란에 조차 끼어 들기 힘들게된 요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일이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날 패션쇼가 끝나고 나서 남편의 친지분들이 베풀어주신 축하연에 참석했던 때의 감격을 또한 잊을 수가 없다.
분에 넘치는 찬사와 축하를 받으면서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정을 가진 주부로서 직업을 갖다보면 아무래도 남편을 섬기는 일과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을 보살피는 일에 소홀해지기 쉬운데 그런 일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북받쳤기 때문이
다.
여러 면에서 생활이 합리화되고 직업을 가진 기혼여성이 상당히 많아진 오늘날도 직장과 가정의 양립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재래식 생활양식 속에서 모든 것이 불편하고 여성이 바깥일을 한다는데 대한 이해가 극히 부족하던 그 당시임에랴!
항시 관용과 아량으로 아내를 대하는 남편이나 바쁜 어머니를 이해하고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할 줄 아는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과연 발표회를 열 만큼 디자이너로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반문해보는 가운데 첫번 패션쇼의 밤은 저물어갔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