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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버리니 천국이 안전에|미움도 원망도 모두 잊고 시골 성당에서 님과 함께|한 꺼풀씩 벗겨 가는 지난날의 껍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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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영혼의 어머니. 비바람이 몰아치는 아침나절이에요. 「비발디」 의 기타 협주곡 선율이 바람을 타고 가슴 한복판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오늘은 제가 음악이 되어 바람을 휘 감습니다.이토록 거센 바람소리가 감미로운 사람의 속삭임으로 들린다면, 어머니, 당신은 놀래시겠습니까? 오늘은 바람 안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제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시는 그 님을 만납니다.
며칠 전에는 소나기가 되어 저를 흠뻑 적셔준 님이었고 큼지막한 우산으로 변신하여 빗방울을 피하게 해 준 님이었습니다. 저는 어디에서나 그분을 만나 기쁘게 담소하고 얼싸안고 춤을 춥니다. 님을 향한 애절한 노래를 작곡하기 의하여 원고용 용지를 싸들고 숨어들은 이 조용한 시골 성당 안에서도 물론 저는 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곳 본당의 사무장이 상다리가 견고한 갈색장을 선물했어요. 분당 신부님께서는 제가 글을 쓸 동안 신자들조차도 사제관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려 놓으셨죠. 너무 환송하고 감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이미 저를 위한 사십일 기도와 미사봉헌이 시작되었고, 저는 사뭇 감격과 눈물이 뒤범벅되어 성체불 앞에서 코를 바닥에 대고 엎드립니다.
사랑이 괴고 넘치고 또 솟아요. 신부님 깊숙이 스며든 님의 모습을 감상합니다. 그분의 겸손을 찬탄하며 제 교만의 껍질을 한 꺼풀 씩 벗겨갑니다. 누더기 옷을 벗습니다. 지난날의 고약한 습관을 부수고 굳은살을 빼고 덕지덕지 붙어 있는 추함을 씻어버립니다. 그러나 끊고 비우는 과점은 아직 안개에 가려 입술에 피가 맺힐 따름입니다.
그리운 어머니, 지난번 편지에서 저에 관한 소문을 잠깐 언급하셨죠? 글세, 제가 죽었다는·소문이 벌써 9개월째 계속되고 있어요. 제 장례식에서 누가 조사를 읽었다는 구체적인 얘기까지 나돌았다니 얼마나 희한한 일이에요! 어머니의 말씀 마따나 우리는 벌써 오래 전에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별로 충격적인 유언비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사랑하는 님과 더불어 먹고 대화하고 웃고 팔짱끼고 걷는 길들은 결코 지상의 것이 아니니까요. 한없이 모자라고 부족
한 존재이지만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줄 각오가 되어있고 기도하기 위하여 깨어있는 생활 속에서 저는 천상의 바람을 맛봅니다.
어떻게 하면 더욱 작아지고 비천한 자가 되어「없음」의 상태로 돌아갈까만을 골똘하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결사적으로, 그 님만을 사랑하려는 일편단심을 가꾸어 가고 있는 이 고장의 9월이 퍽이나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여기는 헐뜯음이 없어요. 눈살 찌푸림도 없어요. 성을 내어 언성을 높이는 일도 물론 없어요. 서로 위해주고 아끼려는 마음만 출렁거려요. 내가 불편하더라도 상대방이 안락하기를 바라는 고운 마음이 수를 놓아요. 여기에서는 버리는 작업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요. 미움과 원한과 앙심, 그리고 우리의 피를 탁하게 해주는 온갖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있습니다.
서로 진심으로 격려해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고난을 통해서만 영광이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님만을 묵상합니다. 심장의 갈괴 가운데 님의 호흡을 심기 위하여 매 순간을 거룩하게 걸러냅니다. 어머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에요. 지난겨울 당신과 함께 피정하며 지냈던 날들이 천국의 것이었듯이 영혼의 빛으로 알록달록하게 조명된 이곳이 천국이에요. 어떤 위기나 불안 앞에서도 태연자약한 평화와 기쁨이 이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 개강선물로 「평화와 기쁨이라는 이름의 바람」을 보내 드립니다.
아울러 아무리 다해도 모자라는 딸의 의무,「사람이라는 이름의 바람」도 동봉합니다. 어머니,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히 당신과 같이 주님 안에 있게될 크나큰 축복을 감사하며 건강을 위하여 무릎 꿇습니다.

<희곡작가>
▲41년 서울출생 ▲ 연세대영문과 졸업 ▲64년 희곡『흘러간 목귀』으로 데뷔 ▲「현대문학」신인상·연극영화예술상등 수상 ▲ 작품집 『인간적인, 진실로 인간적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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