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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예지를 기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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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일각료회의가 사실상의 결렬로 끝난 것은 전혀 예상밖의 일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의 실망은 적지 않다. 「실망」이 문제가 아니라 두 나라 관계의 앞날에 던져진 어두운 그림자가 걱정스럽다.
한·미·일의 3각협력체제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안정과 안전의 초석임을 생각하면 3년만에 만난 두 나라의 주요 각료들이 「안보경협」에 관한 팽팽한 의견 대립 끝에 공동성명 한 줄 없이 헤어진 것이 더욱 안타깝게 생각된다.
공동성명의 차선책으로 나온 「신문공동발표문」은 두나라 대표들이 경제협력 문제에 관한 협의를 계속한다는 것과 한일수뇌회담의 조속한 개최가 바람직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말하여 교섭 계속의 문호가 아주 닫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청한 60억달러 안보경협에 대한 일본의 기본적인 자세가 지난달의 외상회담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번 회의의 실패의 원인이고 보면 교섭의 계속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것인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상회담의 조속한 실현이 가능할 것인지, 또는 바람직한 것인지 그 전망들이 모두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한국과 일본은 65년 국교를 정상화하는 기본조약을 체결했지만 두나라 관계의 내용은 눈사람처럼 쌓이는 우리의 대일무역적자, 한국의 과중한 방위부담과 대조되는 일본의 「공짜안보」한반도 정세에 관한 인식차 등으로 해서 비정상화의 실적을 쌓아왔다.
7O년대 중반 이후에 일어난 국제정세의 큰 변화, 소련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진 동서세력 균형을 보고 한국과 일본이 80년대에는 내용적으로도 관계를 정상화하고 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하여 소련의 팽창주의와 북괴의 전쟁도발의 위협에 대비하는 튼튼한 지역안보의 바탕을 함께 마련하자는데서 일본의 역할분담, 대일안보 경협요청의 발상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에 대한 인식을 우리와 같이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사태에 대한 공동의 대응책을 세우는 단계에 가서는 번번이 좁은 소견을 드러내고 이해타산을 앞세운다.
이번 회의에서도 예의가 아니었고, 그래서 양쪽의 주장은 끝까지 평행선을 그었다.
일본은 워싱턴에서, 오타와에서 안보와 경제협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원칙에 동의했다. 세계평화와 안정의 유지에 중요한 지역에 대한원조를 강화하겠다고 공약도 했다.
그러면서도 대한경협이 안보와 분리되어야한다는 명분론을 내세우는 일본에 차라리 동정이 간다. 소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소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속셈이다.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다른 두 나라인 북괴와 베트남에 대해서도 미소를 아주 거둬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다.
일본의 이 명분론은 차관액수에 관한 그들의 이해타산을 가려주는 「무화과잎」이기도 하다. 그런 약점을 가려야하기 때문에 안보경협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단언을 하기도하고 60억달러는 너무 큰 액수라 예산에 책정된 정부차관(ODA)의 범위안에서, 그나마 연도별, 프로젝트별 검토를 거쳐 제공하겠다고 하기도 한다.
일본은 이미 파키스탄, 타일랜드에 안보경협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선례가 없다고 해도 일본방위의 방파제가 되는 한국에 대한 경협을 가령 중남미, 아프리카지역의 나라들에 대한 경협과 같은 차원에서 고려한다면 일본의 역할분담은 어느 구석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연도별, 프로젝트별 검토를 거쳐야한다는 주장에는 더욱 불쾌한 생각이 든다. 그것은 과중한 방위부담을 지고 있는 가까운 이웃을 돕는다는 의미보다 경제적인 타산이 중요하다는 의미밖에 안 된다. 「소노다」외상이 남발한 발언 중에는 한국의 경제개발을 지원하면 결국은 일본의 경제적인 이익을 침해한다는 말이 있었다.
프로젝트별 운운하는 것을 「소노다」발언과 관련시켜 보면 일본의 단견과 경제 동물적 본색을 쉽게 읽을 수가 있다. 상호의존관계가 같은 이념과 가치관을 가진 나라들간의 관계의 특징이라는 것을 일본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모르는 척 할 수 있는 것인가.
한국의 대일외교는 큰 시련의 시기를 맞은 것 같다. 인내심을 갖고 교섭을 계속하면서 정상회담을 실현시켜 수뇌들간의 정치적 결단과 안결, 그리고 동시에 일본의 예지에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희망적인 생각」(wishful thinking) 이나 낙관은 금물이다.
외교교섭에 임하는 일본은 「천의 얼굴」을 가진 나라요, 이해 타산에서는 컴퓨터 뺨치는 사람들 같다.
애당초 일본이 안보경협 요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판단한 근거가 무엇이었던가를 우리 정부에 묻고 싶다.
교섭은 계속하되 완전결렬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우리의 일본관과 대일정책의 조정작업을 해두어야 하고 l백억달러의 외자도입선도 미리 검토해 두어야 한다.
일본이 끝내 오타와선언과 미일공동성명의 정신을 위반하고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면 일본의 국제적인 신용추락이라는 응징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한국 홀로 고심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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