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좋은 가을날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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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풍이 휩쓸고 간 다음날 아침은 유난히 맑고 공기 또한 유별나게 상쾌했다. 하늘은 그토록 맑고 피부에 와 닿는 외기는 시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몸 속으로 스며 가슴에까지 파고드는 대기의 기운이 벌써 가을임을 느끼게 한 것이다. 백로가 바로 사흘앞으로 다가왔으니까 이는 당연한 자연의 표지겠다. 거기서도 천지운행의 엄연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계절의 흐름을 보며 사람은 혹 감회에 젖고 인생을 생각하기도 한다. 벌써 동서의 시인묵객들이 다투어 읊조린 바도 있다. 가을의 계절감은 특히 유별나다. 『지나간 여름은 위대하였습니다. 태양시계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눕히고 광야로 바람을 보내주시옵소서. 1년의 마지막 과일이 열리도록 따뜻한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베풀어주십시오.』라고 독일시인 「릴케」는 읊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우리는 「위대한 여름」의 은혜로 풍성한 가을의 수확을 기대하고 있다. 이제 뜻하지 않은 태풍 때문에 다소 실의를 느끼고 있다. 영호남을 휩쓴 태풍 때문에 인명피해도 적지 않으며 공들여 가꾸었던 농작물피해는 특히 농민들의 비탄이요 슬픔을 몰고 왔다. 물이 빠진 논바닥에서 쓰러진 벼포기를 일으켜 세우는 남녀노소 농가일손들의 쓰린 가슴은 그 「광야의 바람」을 원망조차 못하고 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일어섰던 것이 상고이래 우리농민들이다. 농민들은 「바람」과 「햇별」의 진실을 알고있기에 비록 천재에 있어서도 원망만으로 그치진 않았다. 벼포기를 일으켜 세우고 농약을 뿌리며 새물을 논에 갈아대는 정성은 그치지 않는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니다. 지난 여름 내내 논밭에 뿌렸던 땀방울을 태풍의 발톱에 할퀴었다고 해서 헛되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논밭을 가꾸고 다시 일궈야만 농민들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명에 충실함이며「신성한 일」이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며 하늘에 대한 믿음이다. 농민들이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은 바로 생활이며, 인간으로서의 수분을 지키는 경건한 자기 헌신도 된다. 태풍일과의 대지엔 이제 「릴케」가 읊은 대로 「따뜻한 남국의 햇별」만이 기대된다. 농부들이 벼포기를 일으켜 세우고 부러진 과수목을 버팀대로 지탱하는 땀방울을 뿌릴 때, 이제 하늘은 「햇볕」을 듬뿍 부어주어야 한다. 가을의 햇볕속에 우리의 결실은 보다 알차게 영글고 무르익어야 한다. 그것은 비단 농민들만의 소망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우리는 농민들의 눈물과 땀방울의 의미를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가을의 결실에 보다 큰 정성을 마음으로 퍼부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농토의 결실만에 국한될 수 없다. 가을의 풍요는 농토에만 것도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맘 방방곡곡에서 가을의 결실은 풍성히 거둬져야 한다. 기업에서, 공장에서, 학교에서 또는 병영에서 가을의 결실은 충실한 것이 되어야겠다. 우리의 창의와 노력과 정성과 사랑은 무한히 값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인생의 한 가을은 결코 헛되고 덧없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 우리는 모두 저 불볕의 한 여름을 땀흘리며 진지하게 살아왔지만 오늘의 고난을 극복하는데도 지혜롭게 마음을 합쳐갈 뜻을 다져야겠다. 올해 초가을은 쓸쓸하고 괴로왔지만 고난을 이기는 그같은 합일된 마음으로 우리 모두 추석의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도록 정성을 쏟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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