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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2>제 74화 한미외교 요람기(69)|험악한 정상회담 분위기|「아이크」가 한-일 정상회담 필요성을 강조하자|"일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 이 대통령 퇴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아이젠하워」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 직전에 서울에서 중립국 감시의원만의 공산측 대표단을 내쫓게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치밀한 계획 하에 단행한 외교적 술수였다.
이 대통령은 틀림없이 미국 측이 일본문제를 꺼낼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대한 카운터펀치로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을 단행한 것이었다.
미국이 감시 위원단 축출을 문제삼은 것은 휴전협정 상 그들에게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또 그냥 두면 이대통령이 제2, 제3의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후 미국은 서방측 감시 위원단인 스위스·스웨덴 대표가 북한에서 냉대를 받자 끝내 그들 스스로 공산측 감시 위원단을 한국에서 완전히 축출해 버렸다.
이 대통령은「덜레스」국무장관이 친일파 인사가 아니냐는 의심을 평소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덜레스」장관은 국무성에 들어오기 전 뉴욕에서 굴지의 변호사 사무실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특히 일본관계 사건을 많이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정부와 일본사람들이 그의 고객들 중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일본의 주문을 받은 정책 제안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예상했는데 이 대통령은 그것이 바로 2차 정상회담에서 나온 것으로 만만했다.
사실 당시 미국언론의 한일관계에 대한 보도는 한국 측에 불리한 것이 훨씬 더 많았다. 타임지가 특히 한일관계를 고약하게 보도했다. 그때마다 이 대통령은 주미 대사관에 호된 기합을 넣곤 했다.
이 대통령으로부터 꾸중을 들으면 양 대사와 나는 번갈아 타임지 발행인「벤러·루스」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고 독자 투고를 통해 분풀이를 했다.
우리가 항의편지를 보내면 타임지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얼마 안가 또 나쁜 보도를 했다. 워낙 항의가 계속되니까 타임지 측은 『동경특파원들이 그런 기사를 보내오는데 실정을 모르는 본사에서 어떻게 일방적으로 깔아뭉갤 수 있느냐』고 해명했다.
이 같은 타임지 측의 해명을 주미 대사관은 소상하게 경무대에 보고했다. 주미 대사관도 힘쓰겠으나 원천적으로 주일 대표부가 뛰어 주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랬더니 이 대통령의 기합이 주일대표부로 갔다. 동경의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홍보를 하라는 것이었다. 주미대사관과 주미 대사관의 이 같은 관계 때문에 양유찬 대사와 유태하씨의 사이가 무척 나빴다.
아무튼 이 같은 전후 사정 때문에 이·「아이크」의 2차 정상회담은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날 한일 국교 문제를 둘러싼 두 대통령간의 논쟁은 정말 치열했다.
이 대통령은『「구보다」(구보산) 일본측 대표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가 유익했다』는 망언을 했다』고 지적, 『그런 일본과 어떻게 국교을 정상화 할 수 있겠느냐』그 말 했다.
이 말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옆에 앉은 「델레스」장관에게 『그게 사실이냐』고 묻고 사실임을 알고 난 뒤 『과거 일이야 어떻든 한일 국교 정상화는 꼭 필요하다』고 한일 국교를 권유했다. 『
그러나 이 대통령이 『내가 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을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을 하자 「아이젠하워」는 화를 내며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런 고얀 논이 있나, 저런…』이라면서 흥분과 분노를 참지 못했다는 얘기를 뒤에 송 대사로부터 들었다.
가까스로 「아이젠하워」가 화를 식히고 다시 들어와 이견의 폭이 큰 한일국교문제는 토의를 보류하고 다른 문제를 토의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이 대통령이『외신기자클럽 연설 준비 때문에 일찍 일어서야겠다』며 퇴장해 버렸다.
덩달아 미국 측이 일어서려는데 양 대사가 제동을 걸었다. 양 대사는「덜레스」장관에게 『두 대통령은 할 얘기가 없지만 우리들은 할 일이 많다. 우리끼리 얘기를 계속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양측대표들은 그날 하오 따로 만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협의할 두개의 분과 위원회롤 구성했다. 며칠을 더 끌어 두 위원회는 결국 미국이 군원 4억2천만 달러, 경원 2억8천만 달러 등 도합 7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는데 합의했다. 이것은 후일 1억 달러가 더불어 8억 달러가 되었고 55년부터 집행되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7월 30일 발표된 양국 대통령 명의의 공동성명은 그때까지 구체적인 합의가 없는 데다 정상회담의 분위기도 좋지 않아 아무런 알맹이 없는 발표에 그치고 말았다.
오히려 한미간의 조정사항은 별도로 양측 수행원간에 작성된 회의의사록에 수록되었으며 이 의사록은 그해 l1월 17일 양국 외상이 정식 서명함으로써 중요한 외교문서로 남게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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