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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이모저모|정변 찾아 경제는 침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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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울에서 곧바로 지상을 뚫고 들어가면 남미의 아르헨티나에 이른다. 밤과 낮이 바뀌고 계절도 정반대이다. 서울에서 가장 먼 지구의 저쪽 끝에 있는 셈이다. 그 곳에서도 한국인은 살고있다.
공식집계로는 한국교포수가 1천l백16가구에 4천8백63명. 의류·편물제조업 4백95가구, 상업4백30가구, 농·수산업 52가구, 기타 l백91가구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웃 파라과이·볼리비아 등지에서 넘어온 불법 체류자까지 합치면 그숫자는 7천여명에 이른다.
뮤지컬 『에비타』의 무대, 그리고 낭만적인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는 60년대에 들어와 시작된 농업이민 때문에 우리에게도 꽤 친숙해졌다. 올10월에도 산타페주의 산하비에르 농장에 13가구의 이민이 입주할 예정으로 있다. 그러나 농사를 짓겠다고 건너간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 장사 길에 나서는 바람에 아르헨티나 이민문호는 거의 막혀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르헨티나를 들여다보면-.
남극대륙과 일부 도서를 제외하고도 대륙의 넓이는 한반도의 12배가 넘는다. 브라질 국경을 넘으면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대평원이 널려있다. 국토의 61%가 농사짓기에 알맞는 기름진 땅이다.
인구는 2천7백90만명. 그중 97%가 유럽계 백인이고, 95%가 카톨릭 신자들이다. 그들 자신이 이민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동양계 이민에 대해서도 차별대우란 거의 없는 편이다.
16세기초부터 스페인의 식민지가 됐다가 1816년 7윌9일 독립을 쟁취, 1853년 연방헌법을 제정했다. 2차 대전중인 l943년의 군사혁명으로 「폐론」이 집권했다가 59년 쿠데타로 무너진 이후 혁명의 악순환을 걷고 그때문에 경제개발이 늦어져 막강한 잠재력을 갖고도 l인당 국민소득은 2천20달러(80년)에 머물러있다.
「페론」은 73년 9윌 총선에서 대통령에 당선, 18년간의 스페인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으나 다음해 7월에 서거, 부인 「이사벨·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 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76년 3월의 혁명으로 물러났다.
육·해·공 3군 총사령관이 단결하여 성공시킨 이 혁명에서 육군사령관 「비델라」가 현역으로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해·공군의 반발로「비델라」 는 예편, 민간인 대통령과 3군사령관 등 4인으로 구성된 군사평의회의 집단통치형식을 취하게 됐다.
군사평의회는 80년 10윌 차기대통령으로 「비올라」 육군중장 (예비역)을 지명, 「비올라」 는 81년3월 3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폐론」 정부의 경제국유화정책과 노동자위주의 성급한 사회복지정책은 사기업의 위축과 악성적인 재정적자를 유발한데다가 국내산업의 지나친 보호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자초는 경제위기를 발생케 했다.
76년 혁명을 전후하여 도매물가는 연9백20%까지 치솟아 페소화는 가치 없는 돈으로 전락했다. 군사평의회의 경제정책목표는 ▲인플레 억제 ▲기본적인 농·목축업의 장려 ▲기초산업육성과 산업투자 촉진으로 수출증대 ▲에너지절약 ▲대달러 환율의 현실화를 통한 국제경쟁력 강화와 무역자유화 등이다.
도매물가상승률은 80년에 들어와 57·5%선으로 잡혔으나 농·목축업과 제조업이 마이너스 성장을 한데다가 국제수지 구조가 크게 악화되어 군사정부의 경제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특히 경상수지는 78년의 l8억달러 흑자에서 80년에는 48억달러 적자로 떨어졌으며, 외환보유고는 79년말 l백1억달러에서 81년 4월말 52억달러로 격감한 대신 외채는 78년말 l백28억달러에서 81년말 3백50억달러로 예상된다. 현 정부는 금년 들어 세차례의 평가절하를 단행, 페소화의 가치는 l백15%나 떨어졌다.
한국동란 중에 지원물자를 원조했던 아르헨티나와는 63년11월부터 상주대사관을 교환하고있다.
양국관계가 긴장했던 것은 73년 6월 「캄포라」 정부가 전격적으로 북괴를 승인한데이어 74년 4월 북괴가 대사관을 개설하면서부터다. 북괴는 현지 언론기관과 학교 등에 파고들었으나 76년 혁명이후 냉각되어 아르헨티나는 77년 6월14일 북괴와 단교를 선언했다.
아르헨티나에 한국교포가 진출한 것은 57년 반공포로 7명이 정착한 뒤 65년 농업이민 20가구, 해외개발 공사에 의한 라마르케 농장 14가구(68년), 이스카야쿠 집단농장 20가구(78년)등과 개인초청으로 인한 이민이 있었다. 그러나 교포들의 잇단 농장이탈 사고로 77년 5월 이후에는 개인이민이 불허되고있다.
한국은 80년도에 섬유류·전자제품 등 7천7백42만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쇠가죽·원자재 등1천2백87만달러어치를 수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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