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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집은 멀어야 좋다지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버스정류장에 가까이 다가오는 버스의 번호판을 확인하며 햇빛을 피해 어느 상점의 차양 밑에 서 있었다. 정류장 꽁무니에 멈춰서는 한 버스의 번호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나는 그 버스를 타기 위해 막 햇빛 속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버스는 결혼하기전 늘 애용하던, 당장이라도 올라타면 친정부모님 곁으로 날 데려다줄 버스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타도 언제나 어설프기만 한 번호를 되새기며 다시 차양 밑으로 기어들었다. 저 버스를 타고 가 버릴까 하고 객기를 부려 보지만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친정집과 측간은 멀리 있을수록 좋단 말이 떠오른다. 나라도 가까이 모시고 살면 그 포근하고 자상한 품속에 가 안기고싶은 마음을 억제치 못할 것이다.
아들들에 딸 넷을 두신 친정 부모님은 두 아들은 직장과 학교의 거리 때문에 분가하고, 위로 두딸은 남편을 따라 서울을 떠나 살며, 셋째 딸은 수녀의 한평생을 택하여 스페인으로 떠나, 딸로는 막내인 나만을 서울 지붕아래 데리고 사신다. 시부모님도 제대로 찾아 뵙지 못하는 며느리 된 도리로서는 친정부모 그립단 말이 차마 안 나오지만 그래도 두분이 사시는 수유리 집이 언제나 그립고 궁금하기만 하다.
내가 결혼하여 새살림을 나던 날, 대문 밖까지 나오신 두분과 곧 스페인으로 떠날 언니를 남겨두고 친정집을 나서는데 정말정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냥 들뜬 기분으로 결혼준비를 했던 것이 너무 일렀다는 자책이 앞섰다. 시댁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나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남편의 위로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딸 키워 아무짝에 소용없단 말이 정녕 맞는 말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요사이는 아들도 결혼하면 많이 들 분가하여 살기 때문에 아들보고 싶은 어머니 마음도 퍽 간절하다고 한다. 그래도 아들은 보시고자 하시면 떳떳이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한 딸은….
지갑이라도 두둑하면 예라 택시라도 타고 달려가겠지만. 넓은 서울의 끝과 끝, 왔다갔다하면 5, 6천원 돈이 사실 적은 돈이 아니다. 가계부를 꼬박 적는 주부라면 선뜻 나서기 힘들 것이다. 시간이라도 흔하면 버스라도 타겠지만 회사에 다니는 나의 경우는 1년이 다 가도 그런 시간은 쪼갤 수가 없다.
어떤 땐 딸로 태어난 것이 공연히 심술이 나고, 친정에 가고 싶단 말이 묵살될 때는 남편마저 밉고 야속해진다. 남편은 딸이 더 예쁘다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마음 같아선 아들만 낳고 싶다. 딸로 태어나 효도도 못하고, 부모님 애만 태울바에야 아들로 태어나는 게 좋지 않은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어찌 보면 다행이기도하다.
며칠전 생각해낸 희한한 방법이 있다. 편지를 쓰는 것이다. 시부모님께도, 친정부모님께 도. 마음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가득 담아 예쁜 리본으로 묶어 뽀뽀를 한번해서 보내드리는 것이다. (서울강남구 삼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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