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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김주성은 벼른다, 농구사랑 금빛엔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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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주성은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 국가대표로서 피날레를 장식하기 원한다. 지난 4일 농구 월드컵 리투아니아전에서 분전하는 김주성. [라스팔마스=뉴스1]

남자 농구 대표팀 센터 김주성(35·동부)은 한국 농구의 대들보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94년 뒤늦게 농구를 시작한 그는 4년 만인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1998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그리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는 결승에서 중국에 102-100, 짜릿한 역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내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당시 서장훈(40·은퇴)과 함께 트윈 타워를 구축했던 김주성은 결승에서 21점을 올렸다. 미국프로농구(NBA)에서 뛰던 2m29㎝의 공룡 센터 야오밍(34·은퇴)에도 밀리지 않았다.

 1998년부터 5회 연속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김주성은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이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마지막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일 스페인에서 끝난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각오를 들어봤다.

 - 아시안게임에 5번째 출전한다.

 “지난해 아시아선수권을 마친 뒤 더 이상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러다 다시 기회가 왔다.아시안게임 5회 연속 출전 기록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 자부심이 헛되지 않도록 마무리를 잘 하고 싶다.”

 - 농구팬들은 2002년 금메달의 영광을 재현해 주길 바란다.

 “그 때는 오로지 중국만 넘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중국을 이기기 위해 죽기살기로 훈련했다. 나도 야오밍을 막기 위해 손으로 그를 꼬집기까지 했다. (서)장훈이형, (김)승현이형 등이 워낙 농구를 잘해서 나도 뒤쳐지지 않으려고 했다. 중국을 이겼을 때는 꿈만 같았다. 그 멤버에 들었던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영광스럽다. 지금은 중국뿐 아니라 이란·필리핀 등 잘 하는 팀들이 많다. 좀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 2006년과 2010년 아시안게임 때는 어땠나.

 “2002년의 영광이 있었지만 2006년 도하 대회 때는 좌절감을 느꼈다. (당시 한국은 8강에서 탈락했다.) 불과 4년 만에 ‘우리가 이 수준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다. 반대로 2010년 광저우 대회 때는 새로운 희망을 봤다. 결승에서 중국에 졌지만 경기에 임하는 자세나 정신력 등에서 2002년 못지 않았다. 그렇게 아시안게임은 내게 희망과 좌절을 안겨줬다.”

 - 프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 부상과 성적 부진 등 힘든 순간도 많았을 텐데.

 “내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은 선수가 되려고 했다. 질 때는 화가 나고 짜증나지만 반대로 이기면 재미있는 게 농구다. 농구에 푹 빠져 농구를 사랑했을 뿐이다. 가족도 그런 내게 큰 힘이 됐다. 반년 넘게 집을 비워도 아내는 늘 내 편이 돼서 나를 묵묵히 응원해준다.”

 - 스스로에게 몇 점을 매기고 싶은가.

 “60점 정도? 이것도 많다. 나는 농구를 잘 하는 선수가 아니다. 키는 크지만 힘이 좋거나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다.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나머지 40점은 못 채울 것 같다.”

 - 인천 아시안게임 목표는.

 “당연히 제일 높은 시상대에 오르는 것이다. 태극마크를 달고 뛸 때마다 최선을 다해 상대를 이겨야겠다는 마음을 갖는다. 지금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갖고 싶다. ”

김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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