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로또' 식으로 의원들을 뽑는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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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학급 회장(옛 반장)을 순번제로 운영하는 담임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중학교 교사 친구의 얘기다. 매달 한 차례 제비뽑기로 학급 회장과 부회장을 임명하는 방식이다. 방학이 있으니 20명 가까이가 감투를 쓰게 된다. “나왔으면 하는 아이는 뒤로 빼고, 안 나왔으면 하는 아이가 ‘점심시간을 늘리겠다’ 같은 걸 공약이랍시고 들고 나오는 게 보기 싫어서”라고 선거 폐지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3월 중학생 1500여 명을 대상으로 벌인 한 입시학원 설문조사에서 73%가 ‘학급 회장에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공부에 방해’가 이유 중 1위(22%)였다.

 친구에 따르면 결과는 성공적이다. 단순히 돌아가며 맡는 것뿐인데도 아이들이 꽤나 적극적이라고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다. 열심히 임무를 수행한 학생의 생활기록부에 칭찬을 남겼더니 부모가 감사의 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다고 했다.

 국회의원을 국민 중에서 추첨으로 뽑아보면 어떨까. 갑남을녀가 모여 법을 만들고, 장삼이사가 국정을 감시하면 이상한 나라가 될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5개월 가까이 법을 안 만들면서도 추석 보너스까지 알뜰히 챙긴 ‘무위도식’ 국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끄떡없지 않은가.

 2500년 전 도시국가 아테네에는 시민평의회 ‘보울레’가 있었다. 3만 명의 시민 중에서 1년 임기로 500명의 구성원을 추첨으로 뽑았다. 대략 시민의 절반이 한 번 이상 당첨됐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성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의 특성’이라고 썼다.

 추첨에 의한 의회 구성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미국 교수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는 『시민 의회』라는 책에서 ‘통계 기법을 발휘해 각계각층의 국민을 대표할 표본을 추출해 의회를 구성해야 민의를 정확히 대변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법률가가 아닌 일반인의 판단을 존중하는 배심원제도에 맥락이 닿아 있다. 두 사람은 정치 비용 감소, 재선을 의식하지 않는 소신 행동 등의 장점을 열거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임금과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타’로 권좌에 앉은 기생집 만담꾼은 제왕교육을 받은 진짜 임금보다 훌륭한 통치자가 되어 간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고 열을 내 가며 정치 지도자들을 뽑았던 것일까. 선출 공직자들이여, ‘존재의 이유’를 입증해 주소서.

이상언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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