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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사태 저류…민족주의|자유노조운동 1주년을 맞은 오늘의 상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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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크리미아의 여름 휴양지로 찾아온 「카니아」와「야루젤스키」, 폴란드의 두 지도자에게 「브레즈네프」는 벌써 몇번째인지 모를 으름장을 다시 한번 놓았다. 국제주의의 입장에서 사태를 면밀히 지켜보겠다. 그것은 언제든지「브래즈네프-독트린」 개입의 논리가 발동될 수 있다는 압력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폴란드에선 또 다른 파업이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정부의 반자유노조 선전활동에 합의하는 인쇄·출판노조의 48시간 시한부 파업이었다. 또 하나의 작은 긴장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한해동안 수없이 대해온, 그래서 이젠 친숙하기까지 한 긴장이었다.
80년8월14일, 조선공업도시 그다니스크의 노동자들은 떼지어 레닌 조선소를 점령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16일 공장연합 파업위원회를 구성하고 17일엔 자유노조 결성권과 사회·경제적 자유화를 뼈대로 하는 16개항의 요구조건을 공산당과 정부에 내밀었다. 한달 반전인 7월1일 정부의 육류값 인상으로 시작된 합의와 파업사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혁명의 빛깔을 띠게됐다.
그로부터 한해-. 혁명발화 1주년을 앞둔 2주동안 폴란드의 거리거리는 배고픔을 항의하는 사람과 차량의 물결로 뒤덮였다. 육류 배급량 감축과 생필품값 인상을 거부하는 폴란드 사상최대의 기아행진 대열이었다.
사태는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일 따름, 동구의 소련위성국중 가장 큰 이 나라는 열두달동안 한발짝 한발짝씩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디뎌 왔다. 그다니스크의 대결 결과 노동자들은 파업권을 확인 받고 공산권사상 처음으로 당에서 독립된 자유노조(솔리다르노스크)를 만들었다.
자영농민노조도 조직되고, 노조는 자체의 언론매체를 갖게됐다. 대전후 처음으로 가톨릭 미사가 방송으로 중계되기 시작했다.
공산당에서도 드디어는 지난 7월 당대회에서 제1서기를 비롯한 당 간부층이 복수후보·비밀투표의 민주방식으로 좁히는 이변을 낳았다.
정치·사회 전반의 이 같은 개혁은 「폴란드식 사회주의」란 새로운 방향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폴란드 민중의 움직임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민족주의적 요소다.
80년 여름이후의 폴란드사태는 크게 볼 때 단순한 노동쟁의가 아니었다. 그 밑에 깔린 가장 깊은 동인은 잠에서 깨어나는 민족주의였다. 자유로운 서방과의 접촉이 많아지고, 물질에 대한 의식이 날카로워지며,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바오로」2세가 79년 모국을 방문해 종교적·정신적인 자극을 주면서 폴란드 국민들의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은 빠른 속도로 되살아나고 자유노조를 통해 조직화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아직 폴란드 사태가 나아갈 길을 암시하는 지표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1년간 폴란드의 실제상황을 결정해온 것은 다섯 갈래의 힘, 즉 ▲자유노조 ▲폴란드 공산당(정부) ▲소련 ▲가톨릭교회 ▲채권자인 서방은행들이었다.
이들은 각기 걸려있는 몫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서로의 힘을 상쇄하고 자제하면서 아슬아슬하게 파국을 막아왔다.
이중 가장 능동·공격적인 힘은 물론 자유노조다. 1천만의 회원을 가진 자유노조는 국민들로부터 묵시적으로 대표권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본질과 폴란드 사태의 혁명적 성격 때문에 노조원들과 국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상의 영향력은 행사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다. 게다가 아직은 자체안의 체제도 제대로 다지지 못했다. 노조지도부도 「바웬사」를 중심으로한 다수온건파와 소수급진파로 나누어져 서로를 견제해왔다. 때문에 처음부터 노조의 지도층은 대중의 요구에 따라가며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노조가 처한 딜레머는 정부와 대중 어느 쪽에도 아주 치우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경제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선 정부와 어느 정도의 협조가 볼가피하나, 협조의 강도에 비례해서 대중의 의심도 커갈것이기 때문이다.
당과 정부가 정한 입장도 이에 못지 않게 거북살스럽다. 「카니아」 제l서기가 1년간 꾸준히 밀어온 협상정책도 점점 지키기 어려워진다. 집권층은 처음엔 부분적인 민주화와 경제개선으로 사태수습이 가능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중의 요구와 경제전문가들의 결론은 모두 근본적 경제구조의 개혁으로 모아졌다. 그 핵심은 경제의 자율화, 중앙통제의 대폭완화다.
그러나 공산국가에서 중앙의 경제통제는 단순한 경제운영방법의 차원이 아닌, 정치적 통제의 필수적 수단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당·노조와 함께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가톨릭 세력이다. 전국민의 90%가 신자인 폴란드에서 교회는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갖고 있다. 폴란드 사태가 터진 후 교회는 이 힘을 배경으로 정부와 노조사이의 중재역할을 하면서 스스로의 영향력도 키워왔다.
교회의 입장은 중립적인 것이다. 노동자와 국민의 권익이나 민주화보다는 국가적 재난의 방지와 교회권익의 보호에 더 주안점을 두고 때로는 정부를, 때로는 노조를 견제해왔다.
소련이 이제까지 보여준 놀라운 자제력은 ▲폴란드에서의 범사회적 혁명운동은 섣부른 무력개입을 허용하지 않으며 ▲국제적인 거부반응을 지금으로선 피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서방은행들은 폴란드에 던져 넣은 1백30억달러의 막대한 투자를 건지기 위해 폴란드 경제 재건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균형을 이뤄온 이 다섯가닥의 힘이 물자부족 사태 속에 예측할 수 없는 대중의 움직임을 어떻게 견더내느냐에 폴란드의 앞날은 달려있다. 그것은 이제까지는 개입하지 않았던 「삶을 위한 본능적 저항」이기 때문이다.<정춘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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