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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고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한은총재를 사칭한 거액사취사건이 밝혀지자 금융가는 심한 충격에 휩싸였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여간 창피스런 일이 아니다.
당사자인 한은사람들은 물론 다른 일반은행 사람들 역시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 모양이다.
금융기관 자율화 분위기가 가까스로 성숙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결정적인 치부를 드러낸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야 문제의 사건성에 흥미로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막장 은행사람들은 가슴에 피멍이 드는 일이다.
더구나 사건의 발단이 오랫동안 몸에 밴 타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수치를 느끼는 것 같다.
매사에 관치를 탓하며 자율화를 외쳐온 그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만큼 깊이 타율화에 익숙해져 있는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 것이다.
스토리가 하도 황당무개해서 그렇지 사건의 본질로 봐서는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이 아니냐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사실 비밀문서를 꼭 들이대고 굳이 극적인 연출을 별이지 않더라도 그와 유사한 하향성지시는 자주 있어온 터였다.
크든 작든 일은 항상 위에서 내려오는 것부터 우선이다. 자기책임아래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데 훨씬 잘 길들여져 있다.
법이나 규정대로 하는 것은 꺼림칙하게 느껴도 지시를 수행하는데는 의심도 주저함도 없다. 지시는 늘 규정도 앞질러 왔기 때문이다.
1백 만 원을 빌기 위해 은행에 갔다가 말도 못 붙인 채 퇴짜 맞은 경험이 있는 서민이 있다면 이번 일을 두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렇게도 까다롭게 자격·규정·서류·절차로 무장된 조은 앞문이 있는 가하면 전화 l통에 활짝 열리는 넓은 뒷문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물론 은행도 할말은 많다. 그런 일이 어디 은행뿐이냐는 반문도 충분히 이유 있는 항변이다.
그러나 은행이란 돈이 모여 있는 곳이고 따라서 권력이나 그를 빙자하는 등속들이 가장 예민하게 교감하는 장소가 곧 은행이라는 점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권력과 돈의 관계를 양단 할 수 없는 한 말이다.
은행의 자율화가 꼭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도 단
순한 경영상의 효율을 높이자는 것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돈을 권력으로부터 재도적으로 보호하자는 것이 그 본질이다.
좁게는 돈올 찍어내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강하는 것이고 넓게는 돈을 모으고 내주는 모든 금융기관들이 장사속의 원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경영케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급한 돈이건, 아무리 높은 사람의 지시이건 간에 수지타산에 맞는 것이라야 하고 또 출금부표가 끊어져야 비로소 금고문을 여는 것이 은행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원리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낙정은 길게 봐서 오히려 은행자율화에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 우선 똑같은 어리석음은 되풀이하지 앉을 것이고 또 이번 사건의 치면에는 은행 모두의 치부인 타율성이 웅크리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줬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발표와 관련자에 대한 엄중한 문책 역시 정부 스스로가 관치금융의 병폐를 웅변적으로 고발했다는 점에서 자율화 추진에고무적인 일면으로 해석 될 수도 있다.
아직도 금융자율화를 가로막고있는 장애물들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하루아침에 그것들이 없어져주길 기대하는 것도 현실과 동떨어진 기대다.
문제는 은행들이 진정으로 자율화롤 원하고 있으며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제대로 쏟고 있느냐는 점이다.
결국 은행 자신에게 달려있다. 타율을 경멸하는 것만큼의 자율에 대한 강렬한 애정없이는 은행자율화는 여전히 요원한 숙제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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