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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정성으로 얻은 영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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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기능올림픽 4연패는 막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밑바닥에는 우리 청소년의 땀과 정성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들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집념의 청소년이며 산업현장의 기수였다.
한여름 3천도가 넘는 가스용접기로 살이 타는 것을 참고 쇠를 녹이는 작업은 자기와의 싸움의 연속이었으며 한밤중에 홀로 이불 속에서 기술서적을 뒤적일 때의 외로움은 자신을 향한 채찍질이었다. 한때는 남과 똑같은 환경에서 클 수 없는 것을 비관하기도 했고 좌절감에 휩싸여 방황하기도 했지만 끝내「기능의 길」을 찾았고 거기서 결실을 얻었다. 그들이 딴 메달은 기능의 세계제패뿐 아니라 그들 자신과 싸운 인간승리에 대한 하나의 증거물이다. 기능올림픽 입상자들의 어제를 조명해 봄으로써 기능한국이 결코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님을 되새겨본다.

<장재열 기자>

<훈련 4년만에 이룬 손재주 - 가구 김종구>
가구 김종구 군(20·금·삼익악기)은 13세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지난해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 이 기쁨을 함께 나눌 부모가 없음을 무엇보다 안타까와한다.
전북 김제에 있는 집에 내려갈 때마다『국제대회에서 금메달 따오는 것을 보고 눈을 감겠다』시던 아버지는 지난해 6월 전국기능대회 기간 중『집안생각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말한다.
77년 서울에 와서 정수직업훈련원에 다닐 때부터 아버지는 빠뜨리지 않고 2주에 한번씩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의 편지는 언제나 아들을 격려하는 내용으로 김군에게 훈련을 이겨내는 힘을 주었다.
김제상고를 2학년까지 장학금으로 다니던 김군은 장학금제도가 없어지자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김군의 손재주를 아끼던 주위사람들은 그에게 직업학교에 갈 것을 권하고 추천서도 써주었다. 어려서부터 온 동네의 썰매는 모두 자신이 도맡아 만들어줄 정도로 손재주 있다고 소문났었다.
더구나 그의 조용하고 성실한 자세는 주위사람들의 호감을 사기에 알맞았다.
78년 지방대회에 처녀출전해서 낙방했고. 79년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후에 정성을 쏟아 실력을 키워 나갔다.
김군은 자기를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 덕택에 이렇게 설 수 있었다며 그분들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특히 시합 중 어느 교포아주머니가 들려준『열심히 하세요』란 말은 평생 좌우명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김군은『비록 아버님생전에 효도 한번 못했지만 앞으로 우수한 기능인이 되어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자신이 관심 있는 기초전통공예에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내겠다고 밝혔다.

<16세때 .철공소서 기술 익혀 - 가스용접 박상주>
가스용접 박상주 군(21·금·대우중공업)은 경기 강화출신으로 각고의 철공소생활 3년을 잊지 못한다.
박군은 중학졸업 후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자 기술이라도 배워 자립해야겠다고 생각, 인천의 어느 용접학원을 다니게 됐다. 3개월을 수강했으나 자격증을 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어느 자그마한 조선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소의 일이 16세의 소년에게는 너무 고된데다 객지생활로 더 버티기가 어려웠다. 박군은 6개월만에 조선소를 그만두고 고향 군청 옆의 대양공업사라는 철공소에 들어갔다.
박군은 왕복 30km거리를 출퇴근하며 피나게 작업에 몰두했다. 그것은 자신이 택한 길에서 낙오자가 되고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군청게시판에「경남 창원직업훈련원생 모집공고」가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는 훈련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기능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해 철공소주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평소에 그의 성실성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철공소에서는 선뜻 추천장을 써주었다.
그가 선택한 학과는 사회에서 익히던 가스용접이었다. 가스용접이란 3천3백 도의 가스용접기로 쇠와 쇠를 녹여 붙이는 것으로 위험이 뒤따른 작업이다.
여름이면 손에 너무 오랫동안 열을 받아 물집이 생기기 일쑤였고 불똥이 튀어 살이 타기도 했다.
한번 시험용접을 시작하면 4시간이상 작업은 계속된다.
만일 중간에 용접을 그만두면 용접부위에 균열이 생겨 좋은 제품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6월에는 면 장갑을 끼고 하던 중 여기에 불똥이 튀어 타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작업을 하다가 손에 큰 화상을 입기도 했다. 이것이 물집이 터지면서 곪았지만 전국대회를 위한 훈련중이라 쉬지도 못했다.

<쇠 깎는 작업, 양손엔 물집이 - 프레스공구 김규억>
프레스공구제작 김규억 군(19·금·금성사>은 9남매 중 막내로 남들 같으면 귀여움을 독차지해야할 위치였지만 중학 2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학업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만했다.
우연히 잡지책에서 정수직업훈련원이 소개된 것을 보고 77년8월 훈련원의 문을 두드렸다. 프레스공구에 대한 이론과 실기가 전무했던 그에게 훈련원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쇠를 깎고 다듬는 작업은 우선 육체적으로 힘이 들었다. 훈련원에 들어온 처음 6개월 동안은 양손에 물집이 아물 날이 없었다. 이 때문에 기숙사생활을 하는 그에게는 빨래가 가장 큰 문제였다. 손이 너무 아파 발로 대충대충 빨아 입어가면서도 오직 모든 목표를 자격증획득에 두고 어려움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갔다.
그는 우선 부족한 이론부문을 보충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모두 잠든 밤이면 일어나 홀로 이불 속에서 플래시로 책을 보기도 했다.
실기 또한 부족한 이론을 보완한다는 뜻에서 더욱 열심히 했다.
눈을 감으면 낮에 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내일은 한번 왼쪽을 더 깎아봐야지.』
그는 하루하루 자기의 일을 반성하고 2급 자격증이 없으면 자신은 살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정성으로 그는 1년만에 2급 기능사자격증을 땄고 기능올림픽에 나가는 특근생으로 뽑히면서 훈련원의 추천으로 일자리도 얻게 뫘다.
김군은『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자신은 이 기술이 아니면 발붙일 곳이 없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79년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2위를, 같은 해 전국대회에서는 1위를 하는 등 날로 발전하고 있다. 앞으로의 꿈도 기능인으로서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해녀어머니가 지극한 뒷바라지 - 미술도장 박태호>
미술도장 박태호 군(18·금·한국중공업)은 창원기계공고출신으로 경남 남해에서 농사짓는 아버지와 해녀인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농사일로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 해녀인 어머니의 수입이 큰 도움을 주고있다.
박군은 이런 가정사정으로 등록금이 싸고 기숙사가 있는 창원공고를 지원했다.
그는 수석으로 입학해 가족을 놀라게 하더니 끝내 국제기능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 물에서만 살던 어머니로 하여금 그리던 서울구경을 하게 하는 효자가 됐다.
29일 세종문화회관 환영식장에서 만난 모자는 양손을 맞잡은 채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해녀어머니가 부쳐준 돈으로 공부한 박군은 어머니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다.
『50세가 넘은 어머니가 해산물을 따기 위해 그 추운 겨울에도 찬 바닷물에 들어가시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고 했다.
박군은『방학 때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는 언제나 저에게 가장 싱싱한 굴과 전복 등을 따다가 준다』며 어머니의 이런 정성이 금메달을 따게된 힘이 되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어머니는 언제나 집안걱정일랑 말고 너 한 몸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저는 언제나 경기에 임할 때 이것이 어머니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라고 제 마음에 여러 번 다짐을 줍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어머니에 대한 선물을 빠뜨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드실 외국산 영양제도 샀고, 손에 바르는 좋은 영양크림도 살 작정이다.
박군은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1년에 한두 번밖에 집에 안갈 만큼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그의 색채배색·칠 작업등은 전국 1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게 주위의 평이다.
정수직업훈련원 감독 박수명 씨는『차분하고 침착한 성격이 세밀하고 꼼꼼한 것을 요구하는 미술도장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을 발휘한 것 같다』고 칭찬했다.

<하루 3시간씩 자고 연습몰두 - 미용 이경자>
미용 이경자양(21·특상·김선영미용실)은 미용경력 6년으로 비록 메달은 못 땄지만 티없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꿈에도 그리던 기능올림픽에 나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다.
어려운 가정의 맏딸로 춘천 재건중학교를 마치고 동네미장원에 견습으로 들어갈 때부터 기능올림픽에 나가 세계선수와 겨뤄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미용부문에서 메달을 딴 선수가 신문과 TV에서 화려하게 소개될 때마다『나도 저렇게 돼보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이양은 춘천미용실에서 4년간 착실히 기술을 닦는 동안 틈만 있으면 서울에 올라와 유명미용실을 기웃거리며 구경을 했다.
지난 79년 이양은 춘천에서는 도저히 자기의 꿈을 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상경, 평소에 선배언니로부터 들어 알고있던 김선영미용실을 찾아갔다.
여기에 다시 견습으로 채용된 이양은 서울에서 갈 곳이 없어 미장원 의자를 잠자리로 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연습은 손님이 없는 밤에 일어나 마네킹을 상대로 하며 기능올림픽에의 꿈을 키웠다.
틈틈이 춘천에 내려가 어려운 집안 일을 돕고 4명의 동생들을 돌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합을 앞둔 얼마동안은 하루에 3시간밖에 잠을 못 자고 연습에 몰두했다.
고생한 보람이 찾아온 듯 79년도 지방대회와 전국대회를 휩쓸어 당당히 기능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복수대표로 뽑혔다.
이양은『아무래도 외국인 머리이고 우리와 스타일이 달라 메달을 못 딴 것 같다』면서『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이양은 신부머리·염색·커트·밤(야)머리 등 거의 모든 머리형을 잘하지만 그중 가장 자신 있는 게 커트다.
앞으로 아담한 미용실을 꾸며 모든 여성을 더욱 아름답게 가꿔주는 게 이양의 소박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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