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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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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인천이 1일부터 직할시가 되었다. 인구 1백8만명으로 전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인천이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것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미추홀(미추홀)로서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의 아들 비류가 이곳 문학산일대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인천」이란 이름은 조선 태조13년(1413년)에 명명되었다. 그 이전 고려 17대 인종땐 순덕왕후 이씨의 고향이라해서 「인주」로 불렸었다.
개항전까지 있던 인천도호부는 시흥땅까지 포함한 광활한 지역을 관할했었다.
「제물포」라는 이름이 유명하게된 것은 1883년 부내면에 인천감리서가 설치된 개항 무렵이다.
1876년 일본이 「군함외교」의 포문을 열기까지 제물포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일본과의 강화조규에서 개항이 정해졌으나 국론 때문에 천연되고 있었다.
79년 일본대리공사 화방의질은 군함 고웅을 영종진에 정박한뒤 『오직 제물포가 개항장소로 합당하다』고 강변했다. 조선정부는 『도성과 지나치게 가깝다』고 이를 거절했다가 마지못해 응낙했다.
개항당시 제물포는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다. 언덕엔 잡초가 무성하고 저지엔 갈대와 억새가 우거진 황랑한 포구였다.
개항전해에 일본은 벌써 이곳에 영사관을 설치했고 90여 일인이 내왕했으며 개항과 함께 본거류민지 차입서가 조인되었다.
개항직후 제물포는 곧장 일·청및 구미각국의 무역항으로 변모했다. 미국의 거상 타운센드양행, 독일대상, 세창양행(마이어양행), 영국계 홈링거양행이 들어와 각축한 것도 이때다. 세창양행은 1884년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양옥으로도 유명하다.
구한국정부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뒤 제물포에 청국·일본·각국(혹은 만국) 지계설립협정이 체결되고 거주·통상은 물론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는 치바적제도가 마련된 것도 이 무렵이다.
최초의 국도·철도가 부설되고 최초의 장거리전화가 가설된 것도 경인간이었다.
그때 선교사 「호레이스·앨런」은 부산은 『너무 왜색이 짙고』, 제물포는 『너무 이국풍』이며 「뜨내기 인구가 많아서』서울에 선교본부를 두게되었다고 술??했다.
인천은 85년부터 10년간 대일 수입고에서 부산을 조금 능가했으나 청국과는 1만5천달러대 58만달러로 비교할수 없는 수준이었다.
최초의 한·미 조약도 여기서 체결됐고 첫 이민선이 한 많은 눈물을 뿌리는 백의인을 싣고 하와이로 떠났던 곳도 이곳이었다.
한국전쟁때는 「맥아더」의 상륙작전으로 자유수복의 환희를 몰고왔던 곳이기도 했다.
항만의 발전은 계속됐다. 1918년 제1도크가 완성되고 74년엔 5만t급 선박등 20척이 접안할 수있는 제2도크와 갑문이 준공됐다. 갈대 우거졌던 그때의 제물포는 흔적도 없이 변하고 있다.
개항 1백년을 2년 앞둔 인천은 직할시로 승격됐다. 타율적인 개항이었지만 그동안 비약적 발전이 있었다. 이제 새인천은 더 큰 발전을 기약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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