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3)|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 (9)|한표욱|이승만 박사 환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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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트루먼」 대통령의 답신을 받고 이승만 박사는 다시 반박 편지를 보냈다. 이 박사는『한국의 임시 정부는 1919년 13도 대표가 모여 구성해 법률적 요건을 갖추었다. 다만 일본이 국토를 점령했기 때문에 국내에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 주민의 절대 다수가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이 박사는 자신의 주장이 미국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교 고문이었으며 유엔 창설 때까지 국무성에서 일한 「앨저·히스」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재임 중 외교 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거의 「히스」에게 의존했다.
그런데 「히스」는 소련과 가까운 공산주의자로 얄타 회담의 묵계를 구상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그후 「매카디」 상원 의원에 의해 공산주의자임이 폭로되어 징역을 살게된 인물이다.
포츠담 회담, 이에 따른 소련의 대일 선전 포고, 나가사끼와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된 뒤 1945년8월15일 일본은 드디어 연합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워싱턴에 있던 교포들은 모두 이 박사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이 박사는 임병직·장기영, 그리고 다른 측근들과 함께 일본 패망 소식에 거리로 뛰쳐나와 함성을 지르는 시민들을 구경하며 워싱턴 역 근처의 차이니스랜턴이라는 음식점에가 점심을 먹었다.
이 박사는 그 자리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소련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다』 고 했다. 이 박사는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6·25를 겪으면서 나는 이 박사의 혜안에 새삼 놀라곤 했다.
그해 9월2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식이 거행되었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국은 중부를 38도 선으로 양단하여 이북은 소련군이, 그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기로 확정되었다』고 포고함으로써 얄타 회담의 묵계는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이 박사는 환국을 서둘렀다. 임병직씨가 주로 국무성과 접촉, 환국 문제를 교섭했고 나는 이 박사 곁에서 실무 준비를 도왔다.
이 박사는 임씨에게 「대령」이라는 계급을 줘 국방성과의 접촉에서 연락 장교 구실을 하게 했다.
그러나 이 박사의 환국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무성은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이 박사를 못 가게 말리었다. 이유는 미국이 임시 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만큼 임시 정부 대통령인 이 박사가 귀국해 기득권을 주장하면 한 국민이 스스로 지도자를 선택할 기회를 잃고 만다는 것이었다.
당시 상당수의 친공계 고위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국무성은 이 박사의 우익 정치 노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환국을 방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OSS건으로 인해 이 박사를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국방성은 그의 처지를 동정했다. 특히 「굿펠로」 대령은 앞장서 이 박사의 환국 절차를 주선했는데 반공주의자였던「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입국 허가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이 박사를 한국의 영웅으로서 환영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국무성이 끝내 조건을 붙여 이 박사는 임시 정부 지도자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환 국 할 수밖에 없었다.
45년10월16일 조국을 떠난 지 33년만에 이 박사는 미 공군 군용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나는 이 박사가 귀국한 후 워싱턴 생활을 청산하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 석사 과정에 등록했다.
내가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꾼 것은 이 박사 곁에서 일하는 동안 느낀바가 컸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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