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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아세안」(5)|정상회의 앞두고 김영희논설위원 순회취재|전략요지 「말래카 해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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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령 원유를 탑재한 대형유조선이 폐르시아만의 호르무즈해협을 무사히 통과한다고 해도 또 하나 지나야할 관문이 있다. 아세안5개국 중 인도네시아·말레이지아·싱가포르 사이를 옹색하게 지나가는 「말래카해협」이다.
소련극동함대의 항공모함이 인도양이나 폐르시아만의 긴장해역으로 긴급출동하는 경우도 말래카해협이라는 「좁은 문」을 빠져나가야 한다.
75년 인도차이나우도의 공산화, 미군철수, 소련극동함대의 증강, 소련·베트남에 의한 인도차이나반도의 장악 같은 일련의 충격적인 사태를 당하고 비로소 우리는 말래카해협의 전략적인 중요성에 눈이 번쩍 띄었다.
4기통 일제 마쓰따 72년형으로 싱가포르에서 말래카시까지 가는데는 꼬박4시간이 걸렸다. 싱가포르에서 말래카까지의 2백30km의 길은 2차선 도로의 양폭에 끝없이 늘어난 고무나무·야자나무 숲으로 온기가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도로자체가 고무나무·야자나무, 그 밖의 열대성 유실수의 숲을 헤쳐내고 뚫린 것이다.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귀여운 하학길의 어린이들의 모습에서도 자원부국 말레이지아의 「내일」의 영상이 떠오르고, 사람손만 가면 그대로 현금이 되는 무성한나무들 사이에 수줍은 듯 살짝 숨어있는 적도하의 농가들은 목가적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정작 찾아간 말래카 해협을 둘러싼 국제적인 현실은 살풍경하기 만하다.
71년 동남아 중립지대임을 밝힌 방콕선언과 때를 같이하여 인도네시아·말레이지아는 말래카해협의 항행의 안전확보는 싱가포르와 함께 세나라 공동의 책임이고, 무해항해의 원칙에 따라 국제항행을 인정하되, 이 해협은 어디까지나 연안국의 영해이지 국제수로가 아니라는 대용의 선언을 해버렸다.
말래카협을 공동관리하는 나라중의 하나이면서도 이 해협의 국제화와 자유개방을 주장하는 싱가포르는 다른 두 나라의 입장을 「유의」 (take note) 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이 나오자 미·일·소 같은 선진해양국가들의 불길 같은 반발이 얼어난 것은 말할것도 없다. 말래카해협은 호르무즈해협과 함께 일본에는 경제적으로 중동산원유수송의 관문의 하나요, 미국의 제7함대, 소련의 극동함대가 인도양에서 서북태평양에 걸친 해역에서 자유로이 작전을 하는데 말래카해협을 통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73년 오일쇼크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75년 베트남 공산화 이후에는 군사적으로 말래카해협의 전략적인 가치가 단숨에 높아져 연안 3국, 특히 인도네시아의 텃세와 야망이 대단해지고 반면에 말래카 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의 급유, 수리, 오고가는 상품의 교역으로 경제의 큰 몫을 집행하는 싱가포르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을 처지에 몰리고 있다.
60년 미국의 핵잠함 트라이턴호가 말래카해협을 잠행하다가 잠망경이 인도네시아 어부의 어망에 걸려 발각된 사건이 일어나자 인도네시아는 『인도네시아의 내수를 외국선박이 무해항행하는 것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호의적으로 베푸는 편의 일 뿐, 편의제공은 언제든지 중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70년대 후반부터 인도네시아는 소련극동함대소속 군함들의 해협통과에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여 군함들과는 무해항이라고 할 수 없어 쟁전통고의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홍콩이 아닌가 싶게 화상이 많은 말래카의 해변에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다. 언덕으로 통하는 석문옆 안내판의 기록을 보면 포르투갈 사람들이 말래카를 점령한 것이 l512년. 그러나 1640년 네덜란드의 공격에 밀려난다.
네덜덜란드는 해협대안의 인도네시아와 함께 말래카지역 일대를「네덜란드동인도의사」의 원료공급원으로 삼고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의 북진을 차단하는 전략적 요새로 삼았다.
그러다가 1819년 네덜란드는 5대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대영제국의 위세에 밀려나고, 1942년 일본군이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독점적인 착취의 지위를 누렸다.
해변에서 만난 64세의 「빈·하지·아브라함」노인의 말을 들으면 그 근처에 일본군의포로수용소와 항공대의 기지가 있었다고 한다. 요즘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이 1주일에 1천척이 넘는 것 같다는 「아브라함」노인의 추산은 싱가포르에서 확인됐다.
말래카시에서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까지는 불과29마일. 수마트라에서 떨어져나온 루파트섬을 기점으로 하면 해협전체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지아의 12마일 영해의 품안에 들어간다.
남지나해에서 발견되는 해저석유는 말래카해협의 중요성을 한층 높여주는데, 만약 국제해양법회의가 인도네시아가 주장하는 소위「군도개념 (archipelagic concept)을 채택하고 말래이아가 지지하는 2백마일 독점경제수역이 적용되면 싱가포르의 존재는 말래카해협과 남지나해에서 저절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정부는 「군도개념」과 함께 「영토적 방위개념」(territorial defence concept)을 들고 나와 그것을 내외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정치·경제·문화·군사의 5개 분야에서 강인한 저항력과 자립성을 갖추라는 일종의 국가철학으로 격상시켜 해협문제를 슬그머니 국내의 통치기술로 연결시켜나가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대혐형탱는 자바의 동쪽에 있는 발리섬과 롬보크섬사이의 롬보크해협, 칼리만탄의 동쪽바다와 젤레베즈의 서쪽바다사이의 마카사르해협쪽으로 멀리 우회시켜 그지역 일대에 유조선과 관련된 공업 프로젝트를 추진할 청사진믈 만들어 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의 이런 꿈을미·일·소 3강과 싱가포르가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아시아·태평양·인도양에서의 미소의 대결, 이 지역의 안전보강, 말래카해협 이북에 위치한 나라들의 경제적인 이해가 좌우될 것 같다. 그리고 말래카해협 문제도 아세안 회원국간의 이해가 충돌되는 경우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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