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에 대한 과례 박용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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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얼마 전 내한한 「테레사」수녀가 카메라 플래시에 에워싸여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사진 찍을 돈이 내게 주어진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요긴하게 쓸텐데』
농담으로만 흘려버릴 수 없는 너무나도 날카로운 암시에 마음이 섬뜩했다. 기실 그녀는 매스컴을 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테레사」 수녀가 「노벨」 수상자가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해보자.
그런 경우도 그의 인격과 업적은 그대로 엄존하겠지만 맞아들이는 자세가 적잖게 그 양상을 달리 했을 거라는 예상이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우리 한국인은 공에 약하다. 더구나 그 상이 「노벨급」이 되고 보면 떠들썩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수상당사자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고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오래된 일이지만 미국 어느 대학원 영문학 강의실에서의 경험이다. 미국의 한 작가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사실을 되풀이했다. 발표가 끝났을 때 교수가 말했다.
『작가의 진가와 노벨상과는 반드시 유관한 건 아닌데 왜 발표자는 노벨상을 그처럼 강조하는 건지 모르겠군. 「펄·벅」이나 「싱클레어·루이스」가 탄 상인데 뭐 그리 대단한 것일라구. 스웨덴 학술원의 결정을 그처럼 절대시하는 의도가 납득이 안가는 구먼.」
물론 「노벨」 문학상 수상자만도 10명 가까이되는 미국에서는 문제가 다르겠지만 교수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문학부문 수상결정의 통고를 받고 「사르트르」는 「처칠」이 받은 상을 어찌 내가 받으란 말인가』라는 일성으로 수상을 거부해 버렸음을 기억한다.
외빈을 극진히 모신다는 점을 굳이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절이 바른 것으로 알려진 우리로서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특히 상으로서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을 맞아들일 때 그 예절의 표시는 지나친 과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테레사」 수녀의 경우 연로한 몸으로 견디기 힘들 예절의 파상공세는 힘에 겨웠을 것이며 우리 나라를 벗어나는 순간 몹시 홀가분했으리라. 그리하여 두 벌 밖에 없는 옷을 빤다는 그 소박한 일상에 매우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복귀했으리라
몇 해 전 떠버리로 이름난 흑인 직업권투선수를 맞아 국빈 대우를 하듯 떠들썩했던 일이 생각난다. 약한 민족이 갖는 열등감의 소산이 아니었던가 서글퍼진다.
우리는 이제 약하지 않다. 약하니 별수가 없다는 자학적 체념에서 위안을 얻었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주체성을 느끼며 자신 있게 가슴을 펴자. 아니면 힘주어 외치는 우리의 반만년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 것인가. <장안실업전문대학장·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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