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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조정 달인의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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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법정은 전쟁터다. 상대는 인간말종 사기꾼이고 나는 순결하고 억울한 희생자다. 법정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런 전쟁터에서 판사나 조정위원의 중재하에 대화를 나눈 후 서로 한 발씩 물러나 합의서에 사인하고 소송을 끝내는 기적 같은 일이 있다. 이걸 조정이라고 한다. 필자가 올해 맡은 게 조정 활성화를 위해 조정위원을 발굴하고, 적재적소에 조정사건을 배당하고, 조정기법을 전파하는 일이다.

 살펴보니 한 젊은 판사의 조정성공률이 무려 80%를 넘고 있었다. 대단한 일이지만 걱정도 되었다. 만에 하나 판결문 쓰는 부담을 덜고 많은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조정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당사자를 위한 조정이어야지 판사를 위한 조정이어서는 안 된다. 일말의 의심을 감춘 채 그를 만나 비결을 물었다. 이후 그의 법정을 경험한 변호사들, 당사자들의 의견을 들으며 검증했다. 그리고 법관 세미나 자리에서 그의 ‘비결’을 발표하도록 설득했다. 그의 ‘비결인 듯 비결 아닌 비결 같은’ 발표는 이렇다.

 당사자를 ‘○○○님’이라고 부른다. 판사가 이렇게 부르면 곧 서로 그렇게 부르게 된다. 재판 시작 때 첫 인사를 이렇게 한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원고가 얼마나 화가 났을지, 피고가 얼마나 좌절했을지 충분히 이해함을 말과 몸짓으로 표현한다. 당사자의 고통을 경청한다. 어느 부분이 제일 억울하세요? 긍정적 분위기를 만든다. 잘 해결될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믿음을 준다. 저는 원고도 모르고 피고도 모릅니다. 사건을 상세히 말씀해 주시면 제가 올바르게 판단하겠습니다. 당사자는 이성적이기 힘들다. 분쟁에서 감정을 분리하고 얽매여 있는 명분을 내려놓도록 설득한다. 판결 쓸 때와 마찬가지로 사건 기록을 꼼꼼히 검토하고 메모한다. 참고할 판례를 찾으면 당사자들에게 나눠주고 투명하게 설명한다. 조정 전날 밤에는 꼭 기도한다. 고통받는 이분들을 도와드릴 힘을 주소서.

 이웃 노인들끼리 고소해 가며 오래 싸워 온 사건의 현장검증 기일에서 한 쪽이 “내 저 놈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싶습니다”라고 고함을 쳤단다. 그러자 그가 한 말, 가슴속에 칼을 품고 계시니 스스로 그 칼에 찔려 다치시는 겁니다. 결국 현장검증 중에 조정이 성립되어 싸움이 끝났다고 한다.

가슴속에 칼을 품고 있어 다치고 피 흘리는 많은 이들에게 이런 기적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약력 : 서울대 법대 졸업, 하버드대 로스쿨 LL.M.(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