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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7)제73화 증권시장(55)|「한일증권」파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구속적부심으로 검찰에서 풀려나자 조동엽씨는 민사소송으로 증권거래소에 맡긴 증거금을 자신의 채권액만큼 압류해 버렸다.
이럴 경우 회사는 다음날 아침 거래소 개장 전까지 매매증거금을 보충해야했다.
나는 갑자기 당한 일이라 증거금을 보충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사실상 조씨의 부채를 갚을 길도 없었다. 결국 한일증권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채권자들이 돈을 더 내서 한일증권을 살린 후 채권은 서서히 회수하려고 했던 것이었으나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8월22일에는 허가가 취소됐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자 소액채권자들은 더욱 빚 독촉을 해왔다.
나는 가재도구와 양복까지도 그대로 남기고 용산 성남극장 뒤쪽의 셋방으로 나앉았다.
집문서는 집사람을 통해 성공회신도회장인 김연수씨에게 맡겨서 빚을 정리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필자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시련이었다.
국채파동은 1백80억원 규모의 제11회 국채발행 여부에서 비롯됐다.
발행할 것이다, 발행계획이 취소됐다는 얘기에 따라 국채가격이 춤을 췄다. 액면 1백원짜리가 24원에서 45원 사이를 오가며 등락을 거듭했다.
거래소는 책동전이 치열해지자 증 증거금 50%를 납부하도록 조치하기까지 했다.
당시 매수측은 미화증권의 서 사장, 대창증권의 장 사장을 중심으로 제일증권·신영증권·내외증권 등 5개 사였다.
당초 정부는 58년 예산안에 발행계획을 포함시켜 국회에 제출했다.
재경위원회(위원장 박만원)는 국채발행계획을 부결시켜버렸다.
미화증권 사장이며 재경위전문위원이었던 서 사장은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재경위안대로 국채발행계획이 취소되는 줄 알고 국채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매수해 들어가면 국채가격은 폭등하고 큰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경위로부터 예산안을 넘겨받은 예결위(위원장 인태식)는 국채발행계획을 부활시켰다.
이에 따라 수세에 몰렸던 천일태평·상호·대양 등 매도측이 총공세를 하면서 물량공세로 나와 국채가격은 24원까지 폭락했다.
국회의 암투는 대단했다. 재경위원장 박만원 의원과 예결위원장 인태식 의원의 치열한 싸움은 인 의원이 이기붕 국회의장까지 끌어들여 국채발행계획을 살려 정부원안대로 통과시키게 했다.
인 의원은 이 때의 과로로 몸져눕기까지 했다.
국채파동의 주역인 5개 매수측 회사는 같은 배에 탔으면서도 의견의 일치가 잘 안되고 정보도 매도측에 새어 들어가는 등 불리한 상태에 놓였다.
5개 회사 중 2개 사는 공동으로 매수작전을 펴면서도 뒤로는 더 많은 수량을 다른 회사를 통해 팔아 넘겼다는 소문이 증권시장에 파다했다.
필자는 증권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7개월만에 국채파동으로 파산하여 한일증권은 문을 닫았다. 게다가 채권자에게 쫓기는 몸이 됐다. 여기서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역시 신앙의 힘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러던 차에 58년10월 승상배씨와 전인배씨가 동아생명보험을 설립하고 필자에게 이사고문이란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증권계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하루는 전인배 상무가 이석운씨(전 창일증권대표)를 소개했다.
소공동에 무역회사를 갖고 있고 상당한 재력과 신용이 있는 대구출신 사업가였다.
이씨는 나의 사업계획에 찬의를 표했다. 즉 자본금은 9대1로 출자하되 작전은 내가 하고 이익금은 반분하자는 것이었다.
59년2월 경희증권을 인수했다. 이씨의 4촌 동생 이석호씨를 전무로, 나의 6촌 동생 윤응암군을 상무로 앉혔다.
나는 명예직으로 고문이 됐다.
이로써 필자는 다시 증권계로 돌아와 활동을 하게된 것이다.
당시 증시에서는 국채매매가 대부분이었고 주식매매는 별로 많지 않았다.
나는 대한증권거래소주식(이하 대증주)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거래소는 영단제여서 출자권이 상장돼 매매거래의 대상이 됐다.
대한증권거래소는 자본금이 6억원에 액면 가격이 50전이었으므로 총 발행 주식수는 12억 주였다.
나는 대증주의 매수작전을 펴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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