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116)제73화 증권시장(54)|1·16국채파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김현철 재무부장관의 1·16국채비매법내 무효선언이 있자 증권회사 대표들은 모임을 갖고 대표자들이 재무부에 달려가기도 했으나 신통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당시 재무부관리과장 김학렬씨를 찾아가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처사를 하는 정부가 있느냐며 항의했다.
투자자들은 증권회사를 믿고 증권회사는 거래소와 정부를 믿고 거래를 했는데 정부가 강제로 거래를 무효화할 수 있느냐며 따졌다. 국민의 손해와 증권회사의 도산을 책임질 수 있느냐며 항의했다. 그러나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2월말이 된 것이다. 채권자인 조동엽씨는 결국 필자를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담당 장석래 검사가 불렀다. 자료를 가지고 들어가서 거래내용을 설명했다.
장 검사는 자료검토 후 불가항력적인 일이라며 돈이 들어오면 조씨에게 갚으라는 말과 함께 필자를 돌려보냈다.
정리매매만을 하던 거래소는 다시 문을 열고 거래가 재개됐으나 매매증거금이 없어서 다시 장사를 할 길이 막연했다.
영세채권자들의 빚 독촉에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그러던 중 한국경제신문 한응렬 사장이 「주간 조일」을 보내주었다. 방에 누워 첫 장을 넘기니 전에 동경시절 안면이 있는 산하태랑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증권금융회사임원에게 대전석유 박경하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박씨는 7천 만원의 빚이 있는 최대의 채권자였다.
그리고 조동엽씨를 제외한 다른 채권자를 차례로 만나 채권액만큼의 자금을 더 빌어달라고 요청했다.
모두다 기꺼이 응낙을 했다. 재기를 해보라며 격려해주었다.
내가 용기를 얻은「주간조일」의 산하태랑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에「만주태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만주일대에서 부동산으로 큰돈을 번 산하태랑은 일본의 패망으로 빈털터리가 되어 귀국한 뒤 일본석유(주)를 세웠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유를 들여와 일본에서 정유한 뒤 동남아에 수출, 이익금을 반분토록 하자는 계약을 사우디아라비아와 맺었다.
패전의 잿더미에서 일본이 완전히 일어서기도 전인데 5억4천만 달러란 거액을 해외자원개발에 투자할 수 있느냐의 여부로 논란이 있었으나 수에즈운하 사건으로 정부도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이 69세인 산하태랑은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알고 「아라비아태랑」이 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달려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느님께서 이 기사를 통해 나에게 용기를 가지고 재기할 것을 명하신 것으로 생각했다.
20대 청년시절만 해도 산하태랑같은 사람은 상대도 안됐던 것이 그는 이제 2천억원이라는 도박으로 국가봉사에 나서려는데 나는 3억6천 만원의 빚으로 주저앉고 말 것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채권자들이 더 출자한 돈으로 매매증거금을 거래소에 넣고 거래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사무실에서 잔무를 정리하고 있는데 조씨가 2명의 젊은이와 함께 찾아왔다. 방에 들어오더니 조씨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두 사람과 몇 마디만을 나누고는 방을 나간다.
두 사람은 지검수사과 직원이었다.
나는 김윤석 변호사를 불러 같이 저녁을 먹은 뒤 서대문 구치소로 갔다.
다음 다음날 월요일 서울지방법원 윤항로 부장 판사실에서 구속적부심사를 받았다. 필자의 변호사 김윤석씨와 고소인 조씨, 고소인측 변호사로 홍모씨와 민복기씨 등이 나와있었다.
적부심이 시작되기 전 김 변호사는 고소인측에 판사실을 나가달라고 요구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언성을 높였다.
윤 판사가 고소인측에 나가있으라고 명하자 이들은 퇴장했다.
한일증권의 관계장부에 대한 검토가 끝난 후 필자는 풀려났다.
나를 구속해야만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조씨는 해군법무관출신 홍모 변호사에게 부탁하여 구속토록 했으나 담당 장석례 검사는 구속하지 않았었다.
그러자 홍 변호사 가지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조씨는 검찰총장을 지내고 새로 변호사 개업을 한 민복기씨를 변호사로 선정하여 나를 구속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장검사도 모르게 김모 부장검사에게 이야기하여 구속영장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3일만에 풀려난 후 이창규씨(후에 일흥증권 상임고문)를 통해 당시 서울신문사장 김형근씨가 구속소식을 듣고 민씨에게 전화를 걸어 언론계의 중진이며 신분이 확실한 사람을 잡아넣는 것이 옳은 일이냐며 화를 냈다는 말을 들었다.
인사도 없던 사람이 나를 위해 그런 전화를 걸었다는데 대해 진정으로 감사했다. 고인이 된 이창규씨의 소개로 이 때부터 김씨와 알고 지내게 됐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