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춘희 교수의 벼루수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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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옛 선비들이 서재에서 나누던 정담이 들리는 듯 합니다』 5년 동안 벼루를 수집해온 이춘희 교수(성균관대 도서관장)의 말이다.
동양에서는 예부터 지·필·묵·연 네가지를 문방사우라고 불렀다.
문방사우 가운데서도 벼루는 인내성에 있어서 으뜸가는 것이어서 선비들이 유별나게 아끼는 것이었다.
『10년 전만해도 토요일오후를 이용, 어지간한 골동 가게나 시장뒷골목을 누비다보면 괜찮은 벼루l점 정도는 대포값으로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갑자기 그림 값이 뛰면서 골동·벼루값도 엄청나게 뛰었고 그나마 물건(벼루)을 구경할 수가 없다』고한다.
이 교수의 서재에는 백연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서예가 여초 김응현씨가 벼루 1백개 정도는 수집하라는 뜻으로 써준 것이다.
60여개나 되던 벼루가운데 섭치는 최근 정리해버리고 인삼 잎 무늬·대나무잎·문살무늬 등이 새겨진 우리고유의 벼루 40여점과 중국의 흠주연·단계연 몇 점만을 갖고있다.
이 교수는 주위에서들 「벼루수집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광이라는 말이 듣기 싫다고 했다.
서지학을 하다보니 우리 나라에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벼루에 관한 책이 한 권도 없어 안타까운 마용에서 연보라도 하나만들고 싶어 벼루공부를 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74년 여름방학 때 중앙시장에서 먹이 더덕더덕 묻은 벼루 한 개를 구입, 집에 와서 먹을 긁어내고 물에 담가두었더니 뜻밖에 벼루 앞뒷면에 금색 별 모양무늬가 선명히 나타나는 흠주연이었다고 한다. 벼루모양도 대나무를 쪼갠 듯 하고 묵지 주변에 대나무 잎이 양각돼있어 「금훈죽절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교수의 애장품 중에는 진천 지방의 붉은 고산 석으로 만든 듯한 초미니 벼루가 있다. 가로 4cm,세로6·2cm.두께0·7cm인의 이 벼루는 양면을 모두 이용할 수 있게 제작된 것으로 무게가 불과23g
7년 전 인사동에서 구한 것으로 오동나무 연갑 속에 세 필과 놋쇠먹통(가로1·8cm,세로2·3cm까지 함께 들어있다.
이조 말 선비들이 만년필이나 볼펜 대신 이 벼루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시작을 할 때 썼던 것으로 보인다.
좋은 벼루는 우선 먹이 잘 갈려야하고 먹물이 쉽사리 마르지 않는다.
며칠을 놓아두어도 먹물이 그대로 있는 것도 있다.
이 때문에 먹과 벼루의 멋을 아는 이들은 보통 먹을 간 뒤 하룻밤을 지내고 붓을 들 기도한다.
벼루하면 대개 검은 돌 벼루만 연상하지만 연재에 따라 골류(골·아연), 도자류(와·비·자연), 금속류(철·은·동연), 목재류(칠연·목사연) 그리고 옥연, 석연 등 6가지로 크게 나눈다. 색깔 도 붉은 색·푸른색·녹두 색·누런 색·하얀 색 등 여러 가지며 모양에 따라 장방형·원형·타원형·육각·팔각 등 다양하며 화석으로 만든 것도 있다.
이 교수의 백연재에는 가족들도 출입금지(?)다.
벼루를 감상할 때는 장갑을 끼고 항상 꿇어앉는다. 벼루에 손때와 기름이 묻으면 돌 속의 문양을 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시중에 나와있는 벼루는 8할이 남포 돌이 저만 해주·대동강·위원·종성석 등으로 만들어진 우리 나라 벼루도 석질이나 색감이 중국벼루에 못지 않다고 한다.
이 교수는 선비들이 쓰든 벼루도 이젠 재산(돈)으로 생각하는 세태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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